매일신문

[건강편지]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그는 무늬만 보호자였다. 순희 할머니가 입원하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가 할머니 임종 순간이 되자 들이닥쳤다. 그리고 환자 상태를 불쑥 물어왔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란 말인가? 임종실에서도 '링거를 빼라, 산소를 떼라, 어떤 약도 쓰지 마라'는 등 주문이 많았다. 인위적인 생명 연장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장황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그것만 하는 전문가인데.

지난 한 달간 순희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통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통증이 있을 수 있으니 편하게 하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 하려고 갔다. 다행히 할머니는 통증이 없었다. 하지만, 호흡이 거칠었다. 순희 할머니의 아들은 어머니를 썰렁한 임종방에 홀로 두고, 그 옆방에서 노트북을 안고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환자는 말이 없었지만, 나는 말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어머니를 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장암 환자인 혜숙 아줌마의 딸을 만났다. 늦은 저녁때나 주말쯤에 왔으니 나와는 초면이다. 암 덩어리 때문에 남산만큼 커진 혜숙 아줌마의 배를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처럼 야무지게 "왜 이러시나? 더 해드릴 것이 없나?"라고 물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게 어머니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는 칭얼대는 어린 딸과 아들에게 초코파이를 건성으로 뜯어먹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말쑥한 혜숙 아줌마의 며느리가 역시 어린 딸을 앞으로 세련되게 업었다. 어제 복수 뺀 자리에서 배어 나오는 축축한 소독 가제를 손으로 가리키며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도저히 어린 아이들 셋을 옆에 두고 상담할 자신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혜숙 아줌마의 며느리와 자원봉사자에게 아이들을 잠깐 보라고 맡긴 뒤 혜숙 아줌마의 딸만 데리고 진료실로 갔다. 15분쯤 면담을 마치고 다시 입원실로 갔다.

혜숙 아줌마의 외손녀는 자원봉사자와 함께 과자를 사러 잠깐 슈퍼로 갔고, 혜숙 아줌마의 외손자는 초코파이를 먹었는지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온통 끈적끈적한 초콜릿이 덕지덕지 묻었다. 그 난리 속에서 혜숙 아줌마의 며느리는 딸을 품에 안고 집에서 준비해온 이유식을 얌전하게 먹이고 있었다.

깡마른 임수 할머니는 3년 전에 말기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2년 전 불행히도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다. 자신도 환자이면서 자식들 힘쓰게 할까 봐 손수 남편 수발을 들었다. 어제는 도저히 안 되시겠는지 큰아들에게 이야기했다. "얘야, 이제는 내가 병원에 가야겠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환자였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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