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도 '용기 있는 아빠'들이 있다. 여자들도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말 꺼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당하게 '아이 키울 권리'를 사용하는 남성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있다. 턱없이 낮은 휴직 급여 탓에 어렵게 용기를 낸다고 해도 장기간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육아휴직을 한 대구의 한 아빠를 만나 3개월간의 '육아 일기'를 들어봤다.
◆"산후우울증, 이제 이해합니다"
지난달 오후 대구 동구 동호동 한 아파트 앞 쉼터. 손자'손녀를 데리고 온 할머니들 사이에 젊은 남성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유모차를 끌고 있는 남자, 전창훈(33) 씨였다. 할머니들도 평일 낮에 아들과 노는 '젊은 아빠'가 신기한지 힐끔힐끔 쳐다봤다. 대구시청 총무과 주무관인 전 씨는 올해 3월 상사에게 3개월짜리 육아휴직서를 내밀었다. 올해 5월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두 아이 육아를 아내에게 모두 맡길 수 없어 휴직을 결심한 것. 공무원이라고 해서 남성 육아휴직자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구시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을 쓴 대구지역 공무원은 모두 225명. 하지만 이들 중 남자는 10명에 불과하다.
휴직 전 고민도 많이 했다. 부모님은 승진에 불이익이 갈까 봐 걱정했고, 전 씨는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동료들의 업무가 늘어날까 봐 마음에 부담이 됐다. 하지만 오히려 동료들이 그를 격려하고 나섰다. 전 씨는 "휴직서를 쓰자 과장님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내가 사무실을 비우는 기간 동안 보통 새 사람이 들어와 업무를 맡는 것이 보통인데 과장님께서 '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며 아이 잘 보고 오라고 하셨다"며 "지금 내가 맡은 일은 다른 동료들이 조금씩 나눠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육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씨는 육아를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회사를 휴일 없이 매일 출근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갓 태어난 둘째는 새벽에 두세 번씩 깨서 울었고, 그때마다 달려가서 분유를 먹여 안고 한참 있어야 했다. 그렇게 아침에 조금 쉬고 있으면 첫째 형준이(2)가 달려와 "아빠, 놀아줘~"라며 보채기 일쑤다. 둘째가 자면 첫째와 놀아주고, 첫째가 낮잠을 자면 둘째가 깨고, 불규칙적인 삶이 무한 반복됐다.
"집에서 애만 보고 있으니까 '산후우울증이 이래서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휴직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애랑 1시간 놀아주는 것도 피곤하다고 생각했고, 아내가 '당신이 애 좀 보라'고 할 때면 속으로 불만도 많았죠.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하루 종일 아이를 보니까 엄마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와 통하는 아빠
하지만 전 씨는 3개월간 돈을 줘도 얻지 못할 값진 경험을 했다. 올해 4월, 아내가 임신 9개월이었을 때 그는 혼자서 형준이를 봤다. 예전에 퇴근하고 씻겨주고, 책 읽어주는 게 전부였지만 이때부터는 24시간 아이와 함께했다.
그는 한 달 내내 함께 있으며 아들에 대해 하나둘씩 알게 됐다. 아이의 낮잠 시간, 활짝 웃던 아이가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음장이 된다는 사소한 습관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 씨는 "이렇게 한 달쯤 지나자 항상 잘 때마다 엄마한테 가서 자던 형준이가 내 옆에 와서 잤다. 내 옆에 누워 자는 아이를 보며 진짜 통한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많다. 휴직을 하고 있을 때 급여가 60만원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지기 때문. 사기업의 경우 고용보험에 가입된 회사 노동자는 자녀 1명당 부모가 각각 12개월씩 휴직을 할 수 있지만 월 급여는 통상임금의 40%로, 최대로 받을 수 있는 금액도 100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전 씨는 "지금은 아내가 3개월간 출산휴가 기간으로 돼 있어 급여가 제대로 나와 내가 이 기간에 맞춰서 육아휴직을 쓴 것"이라며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들은 20, 30대 젊은 직원이 대부분인데 근속연수가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본봉이 낮을 수밖에 없다. 남자가 육아휴직을 결심하는 것도 어렵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휴직을 더 오래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걱정도 있다. 앞으로 아이들을 어디에 맡겨야 할지도 풀어야 할 숙제다. 아내 친정이 경남에 있어 형준이를 전 씨 부모에게 맡기거나 가까운 어린이집을 찾아야 할 형편이다.
전 씨는 "다시 부모님께 육아 부담을 줘야 할지,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지 고민이 많다. 아이를 맘 놓고 맡길 곳만 있어도 일하는 부모들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질 것"이라며 웃었다.
◆제도 있어도 못 쓴다
최근에는 전 씨처럼 육아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오는 용기있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2년 육아휴직을 한 남성 근로자는 모두 1천790명으로 집계됐다. 2011년(1천402명)에 비해 27.6% 증가한 수치다.
극소수지만 대구에도 아이 보는 아빠들이 있다. 대구고용노동청에 따르면 2012년 말 대구경북 지역의 남성 육아휴직자는 총 72명으로 대구가 33명, 경북이 39명이다. 2011년에도 65명이 대구경북에서 휴직을 신청, 남성 육아휴직자는 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전국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국내 전체 남성 육아휴직자 1천790명 중 지역 남성은 2.8%에 불과하다.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꺼리는 가장 큰 요인은 복직 후 돌아올 불이익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남성이 육아휴직 뒤 권고사직이나 승진에 노골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금융업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A(40) 씨는 행여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후배들이 있으면 뜯어말리고 싶다. 능력 있는 직원이 육아휴직을 사용한 뒤 승진에서 누락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
A씨는 "그 친구는 부인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육아휴직을 썼는데 당시 회사에서는 '남자가 무슨 육아휴직을…'이라며 꺼리는 눈치였다. 일도 잘하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데 다른 동기들보다 승진이 5년 가까이 늦더라. 과거에 육아휴직을 쓴 것이 계속 승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남성의 육아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딱딱한 직장 분위기도 문제다. 우리나라에도 남성 근로자가 쓸 수 있는 '출산 휴가'가 있다. 지난 2월 2일부터 사업장 규모에 관계없이 남성 배우자의 출산 휴가가 유급 3일에서 최대 5일로 확대됐지만 이 휴가조차 쓰기 힘든 직장인들이 많다.
직장인 서모(34) 씨는 "아내가 애 낳았다고 남편이 3일 휴가를 써도 '자기가 애 낳았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제도는 좋지만 (제도가) 있어도 못 쓰는 것이 문제"라고 털어놨다.
턱없이 낮은 육아휴직 급여도 발목을 잡는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대구고용노동청 관계자는 "휴직 시 급여가 40%밖에 나오지 않는데다 상한액이 100만원이라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육아휴직을 쉽게 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서 휴직을 한 남성 근로자 중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상대적으로 급여 수준이 높은 대기업 직장인인 것도 이런 요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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