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환자 보호자대기실, 중환자만큼 '중태'

남녀 공간·탈의실도 없어 '난민생활'…인권침해·성추행 노출

24일 오후 대구지역 한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보호자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24일 오후 대구지역 한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보호자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24일 오후 대구 남구 A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115.8㎡ 규모의 방 하나가 나왔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병실 입원 보호자 혹은 일반인 출입금지'라는 안내문만 붙어 있을 뿐 관리자는 보이지 않았다. 기자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힐끔힐끔 쳐다볼 뿐 누구도 출입을 막지 않았다.

대기실 안 풍경은 마치 난민소를 방불케 했다. 양쪽으로 20여 개의 사물함이 나열돼 있었다. 사물함에는 이불과 옷가지, 생활용품 등이 아무렇게나 들어가 있었다. 보호자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사물함 아래 어른 한 명이 겨우 누울 법한 폭 60㎝ 공간이 전부였다. 팔을 조금만 뻗어도 옆 사람과 접촉이 이뤄지지만 남녀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아 잠시 누워있는 것도 무척 불편해 보였다. 사물함에는 별도의 잠금장치가 없어 보호자들은 손가방이나 휴대전화를 품 안에 깊숙이 숨겨 두고 휴식을 취해야 했다.

이곳에서 한 달 이상 머무르고 있다는 한 보호자는 "중환자 보호자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24시간을 대기실에 있어야 하지만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해 늘 불안에 떨며 생활하고 있다"며 "좁은 공간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지내야 해 대기실에서는 잠시도 마음 놓고 쉬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대구지역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인권운동연대와 보건복지연대회의는 24일 경북대병원 앞에서 "보호자들의 수면과 휴식을 위해 마련된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이 남녀 구분은 물론 탈의실도 마련돼 있지 않아 24시간 인권침해와 성추행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인권운동연대가 지난 4월부터 경북대병원과 영남대의료원, 계명대 동산의료원, 대구가톨릭대병원, 파티마병원 등 대구지역 5개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실태를 조사한 결과, 대부분 낙제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환자의 경우 응급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보호자들이 환자의 곁에 항상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는 별도의 대기실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하지만 실태 조사 결과 대부분의 종합병원 대기실이 남녀 공용이거나 구분이 모호해 보호자들이 불편을 겪어야 했다.

대구 중구 B종합병원 심뇌혈관질환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은 좁은 공간에 놓인 의자 18개가 전부였다. 보호자들은 이어 붙인 의자 위에서 쪽잠을 청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이불, 책 등 소지품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여성의 경우 야간에 남성과 함께 잠을 자야 해 성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커 보였다. 남성도 불편하긴 마찬가지.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한 달 동안 생활했다는 전모(52'대구 달서구 월성동) 씨는 "양옆에 여성이 누워 있는데 자다가 손이라도 잘못 뻗으면 오해를 살 수 있어 한 달 동안 복도 의자에서 생활해 왔다"며 "병원 내 편의시설이나 커피숍 등 이익이 되는 공간은 넓고 쾌적한 반면 보호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병원에서 엉망으로 내버려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는 "종합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의 열악한 상황은 보건의료체계 영리화가 가져올 수 있는 인권 침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인권침해와 성추행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시설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종합병원 관계자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과 관련한 보호자들의 불만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며 "이번 실태 조사를 계기로 고쳐야 할 부분과 개선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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