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토종과일 못구해서…홍동백서 대신 알록달록?

수입농산물 대거 등장 주인공 바뀌는 추석 차례상

이것저것 먹을 것들이 색색으로 그득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행복하다.

차례상이 없는 추석은 앙꼬 없는 찐빵과 마찬가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한가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추석 차례상에 최근 각종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세대교체 바람이 부는가 하면 웰빙 바람도 가세했다. 수입농산물이 대거 등장하는가 하면 퇴출 명단에 오르는 음식들도 많다.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차례상 차림의 원칙도 퇴색하고 있다. 바나나, 파인애플, 멜론 등 외국 과일은 물론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이 차례상에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북하게 쌓아 푸짐하게 차리던 차례상 음식도 가족만 나눠 먹을 정도로 간소해졌다. 정성스레 차례음식을 준비하던 모습도 점점 사라져간다. 시장에서 음식을 사서 차례상에 올리는 것도 이젠 어색한 풍경이 아니다.

◆바나나'멜론 입성, 고사리'대구 아웃

차례상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한 것은 바나나. 사과를 제치고 국민 과일로 등장한 바나나는 일찌감치 차례상을 점령했다. 자리도 보통 앞줄 맨 왼쪽에 위치해 감, 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물론 집집마다 다를 수 있다) 최근에는 멜론, 파인애플과 함께 이주민(?) 트리오를 형성 중이다.

이에 따라 사과나 배 등의 지위가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사과는 몸값이 오를 만큼 오른데다 아열대 기후변화로 사과 경작지가 줄고 있어 신세가 처량해지고 있다. 사과는 이민 1세대 과일이었다. 100여 년 전부터 한국에 나타나서 차례상은 물론 제사상을 주름잡던 대표 과일이었다. 전망도 밝지 않다. 사과 재배지는 이미 오래전에 '북상'을 시작해 이제는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들 지역 또한 기온이 올라가면서 복숭아순나방, 복숭아심식나방, 사과굴나방의 활동기간이 늘어나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토종 과수의 자존심을 지켜왔던 배 역시 미래가 불투명하다. 일찍 꽃이 피고 생육시기가 길어지면서 단맛과 씹는 맛이 떨어지는 등 품질 저하 위기를 맞고 있어서다. 단감도 과거에는 남부 지방에서 주로 재배됐으나 지금은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다. 유일하게 퇴출위험에서 안전한 과일은 대추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감귤이나 참다래 등 아열대성 과일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다소 구하기 어렵던 감귤의 경우 제주도 해안가에서 해발 250~300m 지대, 경남과 전남 평야로 재배지가 확대되면서 비교적 쉽게 차례상에 올리는 과일로 떠오를 전망이다.

차례상에 안방마님이었던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등 삼색나물도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강원도 평창'태백, 영남 내륙 산간지역 등 일부 산지에 강수량이 급격히 늘면서 출하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차례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밤도 안전하지 못하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밤나무는 멸종될 거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다.

명태, 대구도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 해수온도가 높아지면서 명태, 대구 등 한류성 어족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 꿩'닭 등으로 만든 탕국도 차례상에서 밀려나고 있는 추세다. 그 자리를 오징어'참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최근에는 웰빙'유기농 바람까지 불고 있어 차례상을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호박'도토리 등을 주원료로 만든 웰빙 송편이 등장하는가 하면 뼈를 바른 닭 산적에 과일을 섞어 냉채소스 꿀 등을 끼얹은 닭고기과일냉채 등도 차례상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차례상을 팝니다

맞벌이 가족이 늘어나고 세태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차례상 문화도 급변하고 있다. 이제 제수 음식도 취향에 따라 알맞게 구입하여 올리는 시대가 됐다. 전화 한 통화나 인터넷 클릭만으로 간단히 해결하는 '맞춤 차례상'이 인기다.

직장생활을 하는 주부 안후남(33) 씨는 추석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앞섰다. 직장 업무가 많은데다 차례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차례상 음식을 주문 대행업체에 맡겼다. 시댁인 청도에는 연로한 부모님밖에 없어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음식 준비가 여의치 않은 까닭이다. 안 씨는 인터넷에서 추석 상차림을 대행해주는 업체들을 꼼꼼히 비교한 뒤 대구 중구의 한 대형업체에 음식을 주문했다. 가격은 25만원. 안 씨는 "남편이 외동아들이라 혼자서 차례를 준비해야 한다. 손이 많이 가는 차례음식을 혼자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다 보면 20만~30만원을 넘기 일쑤인데 대행업체의 경우 저렴하다"고 했다.

지역에도 차례(제사)음식 대행업체들이 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을 받은 뒤 차례음식을 만든다. 대행업체가 제공하는 차례상의 가격은 음식 종류나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지역 업체들이 내놓은 올 추석 차례상은 조상 4명 기준으로 25만원 안팎이다. 밥만 빼고 차례에 필요한 모든 음식을 마련해 준다. 다만, 과일은 따로 구입해야 한다. 차례상을 통째로 주문하는 것이 꺼림칙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손이 많이 가는 나물, 전, 찜 등 일부 음식만 주문받기도 한다.

차례음식 대행업체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편리함과 저렴한 비용 덕분이다. 대구 중구의 차례상 대행업체 관계자는 "직접 장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저렴하다. 대행업체가 차례상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조상 4명 기준으로 20만원 안팎이다. 그러나 비슷한 양의 음식을 직접 만들 경우 30만원 가까이 든다. 대행업체는 대량으로 식재료를 확보해 구입 단가를 낮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다"고 설명했다.

◆때와 장소 논란

차례상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우려와 긍정의 시각도 존재한다. 몇 년 전 추석 차례상에 피자가 올라간 사진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와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한 네티즌이 올려놓은 이 사진에는 여느 차례상과 다르지 않은 상차림이 보이다가 난데없이 피자 한 판이 등장했던 것. 이 사진을 놓고 네티즌은 '새로운 추석 차례상'이라며 공감하는 쪽과 '경우가 아니다'라는 측의 의견으로 뜨거운 공방이 시작됐다. "제사상의 변화는 발상 전환이자 창의적인 생각이다. 시대에 따라 차례상이 효용성 있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제사상 차림엔 전통이 담겨 있는데 그것을 너무 무시한 것 같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사이버 공간을 이용해 차례를 지내는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차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차례상을 어떻게 차리느냐는 가가례(家家禮'각 집안에 따라 달리 행하는 예법'풍속)라 집집마다 다를 수 있지만 시간과 장소는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천호 한국예절대학 부학장은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남의 집 제사나 차례상에 '밤 놔라 배 놔라'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사나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은 정해진 것이 없다"며 "그러나 제사나 차례의 날과 장소는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예서나 가례집람, 사례편람 등에도 나오는 내용이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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