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바기오의 구름

비바람 속에 먹은 맹그로브 게 맛 "잊을 수 없어"

내 륙색의 멜빵에는 나침반이 달려 있다. 높은 산 구름 속에 갇혔을 때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이 나침반은 한미연합훈련 때 미군들이 갖고 온 단도 집에 들어 있던 생존도구 중의 하나다. 그 속에는 낚싯줄과 바늘, 성냥 등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다.

안경알만한 크기인데 남북을 가리키는 것은 귀신이 곡할 정도로 정확하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몇 시간을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나중에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링반데룽' 현상이라 한다.

높은 산에 가스(구름)가 차오르면 동서남북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안방처럼 생각하고 있는 팔공산 서봉에서도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가끔 술에 취하면 오른쪽에 있어야 할 빌딩이 왼쪽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의식의 방황이라고 해야 할 도심 속의 링반데룽 현상은 나를 놓아 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구름은 고요와 적막이 혼합된 애매모호한 물체다. 고요는 사색을 가져 오지만 적막은 공포를 불러온다. 구름은 처해 있는 환경과 보는 각도에 따라 고요와 적막이 각각 다른 본색을 드러낸다. 산 아래 땅 위에서 쳐다보는 구름은 아름답다. 뭉게구름, 삿갓구름, 양떼구름, 벙거지구름 등 어느 것 하나 탐스럽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산 속에서 먹구름 속에 갇히면 사방을 분간할 수 없고 거대한 절망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시인은 산 밑에서 구름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쓰지만 등산가들은 폭설과 구름 속에 갇힐 때마다 유언을 한 줄씩 써내려간다. 시인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이란 시집 속의 '이방인'이란 시에서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지나가는 저 구름…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이라고 읊었다. 또 헤르만 헤세도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그의 소설 '페터카멘친터'에서 호기를 부린 바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과 모든 물상들은 반성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시인 김수영은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라고 탄식한 적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 그렇고 국회의원들과 종북 좌파세력들이 그렇고 따지고 보면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여름이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구름도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륙색에 달려있는 나침반은 반성할 줄 모르는 것들에 맞서기 위해 대롱거리며 나를 따라 다니고 있다.

나는 이번 필리핀 바기오 여행 중에 호된 먹구름을 만났다. 왕복 2차로 도로의 흰색 표지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시계는 3~5m에 불과했다. 이날 우리는 바기오에서 해변도시 산 페르난도로 가는 중이었다. 짙은 구름 속 내리막 꼬부랑길을 1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난 코스였다. 그곳에 가면 맹그로브 게(Mangrobe crab)를 싼값에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오늘 그걸 찾아 나선 것이다.

시장은 넓고 상품들은 다양했다. 낯선 냄새도 역겹지 않았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마침 경찰관이 보이길래 "WC? 워터 클로셋?"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바지 지퍼에 주먹을 내밀고 "쉬이"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하, 씨알!"(CR'Comfort Room)하면서 나의 손목을 잡고 파출소 안의 안락하지 못한 변소로 데려다 주었다. 너무 고마워 1달러(40페소)짜리 한 장을 줄 생각이었는데 볼일을 보고 나오니 그는 보이지 않았다. 급사 아가씨에게 "어데 갔노" 하고 물어 봤더니 그녀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린 맹그로브 게 5㎏(25마리)을 1천400페소(4만2천원)를 주고 사서 해변의 씨 파크 비치 리조트로 들어갔다. 장맛비는 놋날 같이 쏟아지고 바람은 창문이 휠 정도로 불어 재꼈다. 200페소를 주고 삶은 게 맛은 영덕대게 맛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바람 속의 그 운치 있는 풍경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최영미 시인의 '가을에는' 이란 시를 추려 읽으면서 게 다리나 뜯자.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리 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중략)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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