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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 광장] 역지사지에 대한 보통 사람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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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기. 참 소중한 덕목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역지사지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나 싶다.

추석 귀향을 앞두고 동갑내기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친구의 시어머니가 친구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지치지도 않고 당신 딸 자랑을 하더란다. 딸이 이런 보석도 사주고 저런 가구도 사주고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는 말씀의 속내평이야 뻔했다. 시집간 딸도 이렇게 잘하는데 맏며느리인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냐는 타박을 에둘러친 것. 친구는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신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다. "어머, 어머님, 이 보석 진짜 비싼 거 맞죠, 저 가구도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네요, 시집간 딸이 친정 엄마한테 잘하니까 얼마나 좋으세요," 그러고는 다 들리게끔 혼잣말을 했다. "에그, 나도 아가씨 본받아서 울 엄마한테 비싼 보석도 사드리고 고급 가구도 사드리고 자주자주 찾아봬야지!"

당신 며느리가 남의 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벼락같이 깨달은 시어머니, 얼굴색이 확 바뀌더니 다시는 며느리 앞에서 딸 자랑을 하지 않는단다.

역지사지! 말이 쉽지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내 경우를 돌아봐도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동네 구멍가게 딸로 살았다. 그때는 코앞에 있는 구멍가게 놔두고 멀리 있는 대형마트 가는 이웃 사람들이 미웠다. 지금 소비자로 사는 나, 주차가 편하고 물건이 다양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를 이용할 때가 많다. 차 없이 뚜벅이로 살 때는 좁은 골목길에까지 차를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미웠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서서 매연을 들이마시거나 흙탕물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싫던지. 그런데 운전자로 살고부터는 골목길에서 차가 오든지 말든지 이어폰 끼고 느릿느릿 제 갈 길 가는 보행자를 답답해한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애들이 내는 생활 소음을 아랫집에서 참아주기 바랐는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 윗집 아이들 소음이 귀에 거슬린다. 내가 아이일 적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에 칩거하는 것이 소원이었건만,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가 문 잠그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보기 싫다.

안 그래도 정신없고 팍팍한 세상, 어지간하면 역지사지의 미덕을 가슴에 품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쓸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역지사지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도 있다. 술 취한 아빠가 아기를 때린다고 하자. 어린 아기가 아빠의 입장에 서서, 울 아빠가 얼마나 세상살이에 지쳤으면 때릴 데도 없는 나를 때릴까 하며 아빠를 이해해 주어야 할까? 바로 앞에 들어서는 대기업 슈퍼마켓 때문에 졸지에 망하게 생긴 구멍가게 주인들이, 얼마나 불경기면 이런 골목에까지 슈퍼마켓을 낼 궁리를 다 했을까 하며 대기업의 입장을 염려해 주어야 할까?

며칠 전, 영화 '소원' 시사회에서 소원이가 너무 애련하여 옆 사람 보기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 소원이 부모에게 감정이입하여 소원이를 다치게 한 놈의 목을 확 따버리고 싶기도 했다. 나는 거기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인 소원이 친구들 그리고 심리상담사, 경찰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악스러운 기자들에게도 역지사지할 수 있었지만, 오직 한 인간, 등교하는 어린아이를 붙들어 끔찍하게 성폭행한 인간한테만은 손톱만큼도 역지사지할 수 없었다. 그런 인간조차 역지사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사이코패스이거나 어쩌면 성인(聖人)일지 모른다. 어쨌든 보통 사람의 감각은 아니다.

역지사지가 필요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는 보통 사람의 감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역지사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역지사지를 유도하는 역사 교과서 소식을 접하고 보통 사람의 감각으로 어찌 열불 나지 않으리. 도대체 왜 우리 아이들이 우리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왕비를 무참히 살해한 적국 살인마의 회고록을 8줄이나(안중근 의사 얘기는 달랑 1줄 나오는데!) 읽고서 왜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지, 보통 사람의 감각으로는 이해 불가다.

박정애/강원대 교수·스토리텔링학과 pja8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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