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손뼉을 '딱!' 치게 되는 표현을 만날 때가 있다. '아직도 못다 한 사랑'이 그러하다. 한글에서의 형용사 표현의 우수성이다. 동사가 잘 발달된 영어권 전공자에게 이 표현을 물었더니 기껏 'endless love'니 'I still love you'라고 번역한다. 명함도 못 내밀 번역이다. '아직도 못다 한'이 머금고 있는 안타까움과 여운과 향취를 절반도 못 살리고 있지 않는가?
한글은 15세기 중엽(1443년)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한자 문화권에 있을 때,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되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창제 당시 온 국민이 박수를 치며 감격하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나 보수와 진보가 있기 마련이어서 세종 역시 보수층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의 국민 정서상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랑캐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전대미문의 대형 사건이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험에 가까운 발상이었던 것이다. 배우기 쉬운 한글을 전 국민이 익히기 시작하면, 지식인들마저 어려운 한자를 멀리하여 중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봐 염려하는 분위기였다. 세종이 특별히 공을 들인 집현전 학사들조차 반대가 심했다. 사대외교에 위배된다는 명분이었다. 마지막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최만리가 반대 상소문을 들고 임금을 찾아갔을 때, 신하들의 성화와 당뇨 후유증으로 시력장애가 온 세종을 보고 뜻을 접었다는 일화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21세기에는 놀랍게도 영국의 옥스퍼드 언어연구회가 한글을 세계 우수 언어로 지정했다. '대지'의 작가 펄벅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극찬했고, 미국 시카고의 매콜리 교수는 언어학자로서 최고의 글자를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한글날만 되면 제자들과 파티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미련한 후손들이었다.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조차 주목하고 기리는 한글날을 10여 년 동안이나 국경일에서도 제외시켰으니, 이 망신을 어찌할까. 한글을 국보 제1호로 정하고 한글날을 문화의 날로 지정해야 한다던 학자들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다행히 올해에는 한글날이 국경일로 부활되었다고 한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우뚝 서고야 마는 한국인의 기질 덕분이리라. 기쁜 마음에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아직은 빨간 날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출시된 지 오래된 고물 폰이라 별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온 세상에'아직도 못다 한 사랑'을 날려 볼까나.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혹, '어떻게 말로 다 하나요?'라고 답해 올는지?
소진 박기옥/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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