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을 막론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은 해방 후 일제 시절 못지않게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오로지 일본과만 싸우면 됐으나 해방 후에는 이념과 노선, 권력을 놓고 동족 간의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했다. 해방 전 공동의 적 일본을 두고 같이 싸운 항일 동지들은 해방 정국에서 적으로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상해에서 시작 중국 전역을 유랑하며 망명투쟁을 벌였던 임시정부 요인들도 그랬고 일제 후반기 항일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주의자들 역시 해방정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큰 적과 싸워야 했다.
심산 역시 이 같은 행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심산의 머릿속에는 통일정부, 완전한 독립국만 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러기에 심산은 상대가 미국이든 친일 부호이든 적당히 타협하며 정치적 곡예를 펼칠 필요가 없었다. 심산의 완고한 원칙주의는 심산을 역사의 격랑에서 고립시킨 원인이 됐다.
해방 초기 남과 북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입국부터 이승만은 달랐다. 이승만은 먼저 동경에 도착, 맥아더의 환대를 받았다. 맥아더는 이승만을 영접하기 위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를 동경에 불렀다. 하지는 미군 군용비행기를 타고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하자 조선호텔의 최고급 객실을 내주고 경호원을 붙여 주었다. 북에 들어온 김일성도 미국이 이승만에 베푼 환대 못지않게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경에 주둔하던 미군 장군에게 정부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귀국이라는 각서를 써주고서야 비행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것도 해방 100일 만인 11월 23일이었다. 이승만을 점찍은 미국의 눈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심산 같은 완고한 민족주의자도 미국의 눈에는 마뜩찮았다. 독립국을 꿈꾸는 심산 역시 미국의 힘에 의지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신탁통치의 소용돌이
1945년이 며칠 남지 않았던 12월 28일 모스크바의 라디오 방송이 미'영'소'중 4개국이 한국에 최고 5년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합의였다. 남한은 삽시간에 벌집을 쑤신 것처럼 요동쳤다. 제일 먼저 임시정부 인사들이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고 대국민 호소에 나섰다. 신탁통치 반대에는 좌'우익이 따로 없었다. 궐기대회가 열리고 당과 이념을 초월하여 전 국민이 하나 되어 반탁을 소리 높여 외쳤다. 사람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박헌영이 소련의 호출로 해방 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상황은 달라졌다. 소련은 반탁운동에 나섰던 박헌영에게 남북한을 합쳐 한반도 전역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으므로 통일임시정부만 수립되면 공산당이 집권할 수 있다며 신탁통치 찬성을 지시했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의 압박으로 곤경에 처해있던 박헌영은 소련의 지침을 따르기로 했다. 공산당은 2차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날 '삼팔선을 없애고 한반도에 단일한 임시정부를 세운 뒤 4개국이 감시하겠다는 삼상 협상안이 조선을 위한 정당한 결정'이라고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명백한 신탁통치 찬성발표였다.
갑작스런 공산당의 찬탁 선언으로 온 나라가 다시 소용돌이쳤다. 공산당의 돌변한 태도에 분노한 심산은 성토문을 신문사에 돌렸다. 동아일보에 실린 심산의 글은 내용이 과격했다.
◆공산당은 매국 반역자
심산은 성토문에서 공산당을 '매국 민족반역자'로 공격했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대로 독립투사였다. 박헌영은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이 형무소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치면 6만 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공산당원들에게 매국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한 심산의 글은 읽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주위에서는 심산에게 피신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겁이 나서 도망갈 심산이 아니었다. 도망갈 요량이면 아예 쓰지도 않았다.
심산은 박헌영 이관술 등 공산당 주요 인사들을 불렀다. 공산당 조직부장 이승엽과 해방일보 주필 이우적이 왔다. 공산당을 대표하여 왔다는 그들에게 심산은 신탁통치를 환영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이라고 몰아쳤다. 이승엽과 이우적은 반탁을 공언하는 것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처사일 뿐 아니라 국가의 앞날에 해로운 선택이라며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후견을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심산에게 통할 말이 아니었다.
다시 이관술이 찾아왔다. 심산은 이관술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이관술은 소련군이 조선에 주둔한 것은 미군의 침략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소련의 주둔은 조선 사람을 위해 이로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심산은 소련군의 장기주둔을 바라는 것은 이리를 방안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며 한 마리의 이리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한 마리의 이리를 끌어들인다면 나라가 결국 두 마리의 이리에게 잡아먹혀 종자마저 없어질까 두렵다고 했다. 이어 나라 팔아먹은 죄를 짓지 말라고 다그쳤다.
◆스승과 지도자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심산은 공산당의 테러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암울한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선비 심산에 대한 좌익 계열의 존경과 신망은 신탁통치 논란 속에 사그라졌다. 좌우 이념을 떠나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던 심산에게 한쪽 날개가 떨어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역사는 아이러니하다고도 한다. 심산은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을 누구보다 우려했다. 그러나 남한의 반탁 열기로 남북은 자연스레 제갈 길을 찾아갔다. 남북으로 나누어 주둔한 미국과 소련은 조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기들의 눈으로 한반도를 보고 있었다.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은 일개인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런 점에서 불의와 사욕에 의한 타협을 거부하고 대의를 굽히지 않았던 심산은 민족의 사표일지언정 대중적 지도자로는 성공할 수 없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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