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부 파독 50주년, 산업역군들의 그때는?

당시 월급, 공무원 10배 넘어…고학력 청년들 맨 주먹 독일행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광부'간호사 독일 파견사업은 해외 취업을 통한 한국경제 기여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독 광부'간호사 모임인 '대구 글뤽아우프' 회원들이 연말 모임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광부'간호사 독일 파견사업은 해외 취업을 통한 한국경제 기여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독 광부'간호사 모임인 '대구 글뤽아우프' 회원들이 연말 모임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 파견 광부들을 위로했다. 국가기록원 제공(1964년)-사진 좌측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들이 독일 교육탄광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 독일광산기록보존소 제공(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 파견 광부들을 위로했다. 국가기록원 제공(1964년)-사진 좌측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들이 독일 교육탄광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 독일광산기록보존소 제공(1966년)

1963년 12월, 247명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두 차례(21, 27일)로 나뉘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에 뿌리내린 첫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였던 광부 파견사업의 시작이었다. 청춘의 산업역군들은 50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이국만리 땅속 깊은 곳의 컴컴한 갱도를 적셨던 자신들의 뜨거운 땀방울이 지금의 한국을 있게 했다는 자부심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글뤽아우프!"(Glueckauf'광부들이 무사고를 기원하며 동료에게 건네는 인사말)

◆해외 취업 통해 한국경제 기여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한국과 독일 간의 광부 파견은 1963년 4월 한국대사관이 독일 광산 측에 한국 광부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이후 독일 측이 일본인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파견을 원한다면 한국인 광부를 고용할 용의가 있다고 답변, 그해 12월 16일 '한국 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 협정서'가 체결됐다. 일본은 1957~1963년에 걸쳐 자국 광부들을 매년 400명씩 독일에 파견했다고 한다.

독일이 한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복잡한 국내 사정과 관련이 있다. 경북도가 지난해 펴낸 '독일 경상도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낮은 출생률에 따라 1960년 전후 청년 인구가 급감한데다 1961년 설치된 베를린 장벽으로 동독지역에서 노동인구의 유입이 중단돼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외국 노동력을 수입했다"고 밝히고 있다.

첫 파독 광부 모집에는 전국에서 4만6천 명이 응모, 100대 1에 육박하는 경쟁률을 보였다. 광부 경험이 전혀 없던 교사'경찰관'군인 출신도 있었으며 대다수가 고졸 이상의 학력자였다. 서울 영등포의 한 파이프 도금공장에서 일하다 1964년 파견된 배용찬(75'대구 수성구 신매동) 씨는 "당시 말단 공무원 월급이 4천원 정도였는데 독일에선 7만원을 준다고 해 지원했다"며 "면접시험 응시 행렬이 당시 직업안정소가 있던 경북대 정문 앞에서 칠성시장까지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광부들의 독일 파견은 1977년까지 모두 7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모두 7천936명이 현지 각지의 광산에 배치돼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13만~19만원)를 받았다. 간호사들은 정부 주도로 1966부터 1976년 사이 모두 1만1천57명이 독일로 건너갔다. 월급은 평균 약 800마르크(당시 원화가치 약 16만원) 수준이었다. 1966년 동료 126명과 함께 간호사 1진으로 떠났던 정동옥(77'대구 수성구 파동) 씨는 "한국에서 수간호사로 일했지만 선진국에 대한 호기심 반, 돈 벌 생각 반으로 독일행을 선택했다"며 "언론 취재를 의식해 한복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서 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1963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79달러였다.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국내 실업률은 30%에 육박해 실업자가 넘쳐났다. 국가기록원 특수기록관리과 이강수 연구원은 "1965년부터 10년 동안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본국에 보낸 송금액은 1억1천53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GNP(국내총생산)의 약 2%"라며 "1965년 월남 파병, 1970년대 중동 특수 등 해외취업을 통한 한국경제 기여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목매어 애국가도 끝까지 못 불러

파독 광부'간호사들은 고된 일과 속에서도 근면절약했다. 틈틈이 독일어 공부, 첨단기술 습득 등 자기계발에도 열심이었다. 1967년 뒤스부르크 인근 광산에 배치됐던 김종천(76'대구 남구 대명9동) 씨는 "반장 교육을 자원해 6개월 동안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귀국 후를 대비해 용접기술 등을 배웠다"며 "지상으로 올라오면 온몸이 까마귀 같았지만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샤워를 할 때면 콧노래가 나왔다"고 했다. 또 간호사였던 정동옥 씨는 "병원 일을 마치고 노인요양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하룻밤에 시신 대여섯 구를 처리하기도 했지만 죽기 살기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해 '천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외국 생활에 적응하기란 지금이나 당시나 매한가지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1965년 파견됐던 김종순(76'대구 달서구 송현동) 씨는 "지하로 1㎞ 정도를 내려간 뒤 다시 수평으로 건설된 갱도를 1시간 정도 달려야 작업장에 도착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아 빵을 쓰레기통에 처넣거나 익숙하지 않은 양고기를 터키 출신 광부들에게 주고 굶는 동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택시기사를 하다 1970년 독일에 갔다는 허재환(70'대구 달서구 진천동) 씨는 "일이 너무 힘들어 로또에 당첨되면 빨리 한국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복권을 열심히 샀던 것도 추억"이라며 "그때는 정말 지겨웠지만 귀국 후에는 독일 햄버거가 그리울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동옥 씨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특혜가 있는 줄 알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전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바람에 3년간 십일조를 떼고 월급을 받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 무엇보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향수병이었다. 당시 광산촌별로 한인 대회가 열렸는데 매번 애국가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첫 소절은 장엄하게 시작해도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를 불러야 할 즈음엔 끝내 눈물바다가 됐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가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1964년 12월 독일을 국빈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경제고문 겸 통역관 자격으로 수행했던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 원장은 '대한민국, 그 위대한 힘'(2009년)이란 저서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12월 8일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탄광에서 일하던 한국 광부들을 찾은 바 있다.

"마침내 '대한사람 대한으로…'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애국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중략)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끝내는 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서독 대통령도 수행원도 모두 다 울었다."

◆지금 바라는 것은 명예뿐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파독 광부들은 1964년부터 1979년 사이 65명이 과중한 근로조건 등으로 사망했다. 대덕노인종합복지관의 '金:바라기 예술단' 단장으로 활발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종천 씨 역시 우울증에 걸려 투신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라인 강을 찾기도 했다. 그는 "안 먹고 안 입고 알뜰히 저축해서 돈을 모았지만 오랜 객지생활로 병을 갖게 됐다"며 "죽으려던 순간 이왕 죽으려면 내 나라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살아남았다"고 회고했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불행한 우리 근현대사와 밀접한 상관이 있다. 구한말 연해주'간도 이주, 1903년 첫 하와이 이민, 1920년대 일제의 강제징용, 옛 소련 스탈린 독재 시절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마찬가지로 광부'간호사 파독도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 백성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된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바라는 것도 그런 애환에 상응하는 명예를 국가가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회원 15명의 '대구 글뤽아우프' 모임을 만드는 데 산파 역할을 한 배용찬 씨는 "인터넷을 통해 파독 광부들을 찾아봤더니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 모임 결성조차 쉽지 않았다"며 "파독 사업은 국가 간의 계약이었던 만큼 국가유공자 예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일부에서는 "지역사회의 미래세대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자치단체가 더 늘려주기를 바란다"고 희망했고, "독일에 냈던 연금을 우리 정부가 대신 받아주거나 국내 연금으로 소급적용해 달라"는 하소연도 있었다.

파독 50주년을 기념해 올해 독일교포 위문 공연을 다녀온 합창단 '대구코랄'의 전효숙(56) 지휘자는 "위로를 위해 어르신들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위로를 받고 왔다"며 "글로벌시대에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이들의 땀과 눈물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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