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아날로그 세대여, 다시 꿈을 반짝이자

한때 도서관에서 '라이프'지 선정 '올해의 사진들'을 보며 새해를 시작하곤 했다. 어느덧 살아내는 데 급급한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그 대단한 '라이프'지가 폐간되었단다. 그게 벌써 2007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니. 71년 만에 잡지사는 폐간되었고, 웹사이트 '라이프닷컴'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2012년에 코닥사는 필름 생산을 중단했다. 내 서랍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필름 카메라를 다시는 꺼내볼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모토까지도 우아한 '라이프'지, 그 마지막 잡지 출간을 앞둔 남자 월터의 이야기가 쓸쓸하게 가슴 속을 파고든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1939년 '더 뉴요커'지에 실린 제임스 서버의 단편 소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이 원작으로, 1947년에 데니 케이 주연으로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다. 오리지널 영화가 연애에 숙맥인 소심 남의 상상 속 화끈한 로맨스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면, 리메이크작은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숨결을 담은 필름 사진에 대한 헌정사이다.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16년차 직장인이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셜리 맥클레인)와 여동생을 돌보는 가장이자, 잡지사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담당하는 직장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간다. 성실하고 우직하지만 그는 어느새 해본 것 없고 가본 데 없는 재미없는 중년남자가 되었다. 마흔이 넘도록 연애도 못해 봐서 맞선정보업체에 가입해보지만, 그의 비어 있는 프로필을 보고도 그를 선택해줄 용자(용감한 자)는 없다.

그러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오는데, 곧 회사의 종이잡지는 폐간되고, 생산성 없는 부서의 직원은 감원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책이 없다면 필름을 인화하여 프린트한 고퀄리티의 지면도 없는 거고, 그럼 월터의 책상도 없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마지막 호 출간을 앞두고 16년간 함께 작업해온 전설의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은 필름 롤의 25번째 사진을 표지사진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월터는 25번째 사진을 받은 일이 없고, 고작 2주일 남은 인쇄 날짜 전, 사진을 찾기 위해 세계 각지로 여행하는 탐험가 숀을 찾아다닌다. 그렇게 하여 가본 데 없고 해본 일 없는 소심남 월터는 그린란드로, 아이슬란드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난생처음 모험을 떠난다.

이 할리우드 모험오락영화는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상상을 대리하여 실현한다. 상관의 인신공격에 한마디 대들어보지도 못하는 초라한 신세, 사모하는 상대에게 가진 게 없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바보 같은 자존심, 가족이라는 굴레에 버거워하다가 어느새 안주하고만 처지, 그럼에도 이 모든 울타리를 넘어 당장 자연의 바람을 맞으러 훌쩍 떠나보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속 로망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벤 스틸러는 '청춘스케치'(1994)를 연출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방황과 욕망을 대변하는 감독으로 떠올랐고,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1998), '박물관은 살아있다'(2006)의 주연으로 미국인이 사랑하는 코미디 감독 겸 배우로 오랫동안 활약해왔다. 벤 스틸러는 아담 샌들러와 함께 미국인에게는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각광받지만, 한국에는 별다른 짙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코미디라는 장르야말로 정서적 일치가 중요하고, 그 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한 시대를 호명하므로, 웃음 코드보다는 함께 공유했던 시대와 사물에 대해 가지게 되는 깊은 공감대와 연결되어 감정적 동화를 불러일으킨다.

월터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캐릭터를 설명하는 초반부 설정에서, 그의 상상을 구현하는 판타지 신이 호들갑스럽게 과장되어 있어 할리우드 특유의 B급 액션 오락물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후 월터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겪는 에피소드에서는 실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진 필름 촬영으로, 영화가 '라이프'지 사진 고유의 색과 톤을 살려내며 아련하게 낡은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로써 영화에는 사진의 아우라가 주는 강렬함이 내내 전해진다. 사무실 벽면을 수놓은 존 F. 케네디, 마틴 루터 킹, 존 레넌, 메릴린 먼로 등 '라이프'에 실렸던 유명인들의 표지 사진은 덤으로, 지나간 현대사의 단면들을 섬광처럼 떠올리게 한다.

디지털 기기가 현대인의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 시대에 정착하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구름 흐르는 대로 늘 어디론가 떠나는 숀 펜이 연기하는 방랑자 사진작가가 풍기는 압도적인 포스는 유행과 세월의 흐름에 초탈한 수도승을 접하는 것 같은 숭고함을 전한다.

사진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영화는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일어나는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유일한 경험과 안녕을 고해야 할 때를 말한다. 오락물로서도 충실하지만 눈과 귀를 통해 지난 세월과 나의 현재 삶을 성찰케 하는 괜찮은 영화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른 법이다. 사람은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에 관해 사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발터 벤야민)

영화평론가 yedam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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