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1920년대 집단 히스테리와 'B사감과 러브레터'

'B사감과 러브레터'의 작가 현진건.

한국 문학 최고의 히스테리 환자는 누구일까. 한국문학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현진건의'B 사감과 러브레터'에 등장하는 B사감을 꼽을 것이다. 자동 경비 시스템과 이메일, 그리고 카카오톡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사감','러브'그리고 '레터'라는 용어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한 시기 이러한 용어들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B사감과 러브레터'는 바로 그 한 시기, 1929년 조선에서 발표된 소설이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은 여학교 기숙사 사감이다. 이외에도 소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신상정보는 다음과 같다. 사십을 앞둔 노처녀. 독실한 기독교도, 누렇게 곰팡이 핀 굴비 같은 외모. 여기에 덧붙여지는 두 가지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첫째, 여학생들에게 러브레터가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둘째, 남성의 기숙사 방문을 절대 금지한다.

여기까지 보면 남녀교제에 대한 B사감의 날카로운 반응은 청교도적 순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서 압수한'러브레터'를 늦은 밤 혼자서 격정적으로 읽는 부분에 이르면 이 증상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또 하나의 병명이 여기에 첨가되는 것이다. 외모, 나이, 성격 어느 면에서 보든지 간에 남성교제 경험이 없었음이 분명하므로 그녀가 이와 같은 정신적 징후를 드러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질병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양의 모든 노처녀들이 공유한 질병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1920년대 조선에서는 B사감처럼 남성교제 경험이 없는 노처녀들만'히스테리'라는 유서 깊은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사랑'과 관련하여 일종의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1923년 기생 강명화가 명문가 아들을 사랑하여 음독자살을, 그리고 1926년 조선 최고 성악가 윤심덕이 유부남을 사랑하여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을 한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실연은 자살의 중요 요인이었지만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실연으로 인한 자살은 그 일반적 현상과는 달랐다.

1920년대 서구발(發)'러브'가 일본을 거치면서'렌아이'(戀愛)라는 신조어로 번역되어 마침내 '연애'라는 용어로서 조선에 유입된다. 남녀가 어깨를 맞대고 산보를 하거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문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본'형식'으로 한 이 낭만적 사랑의 형태에 조선의 신청년들은 열광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사랑'자체보다는'연애'라는 신문화에 광적으로 도취되어 갔다.'연애'풍조에 편승할 수 있었던 자들은 사랑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서, 편승할 수 없었던 자들은 자괴감으로 인해서 삶이 파탄에 이르렀다. B사감, 윤심덕, 그리고 강명화. 이 세 사람 모두 1920년대 조선을 휩싼 집단 히스테리의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집단 히스테리는 근대적 신문화 수용 준비가 채 갖춰져 있지 않았던 조선의 미약한 문화적 토대가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극심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킬 위험을 보이고 있다.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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