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훌라후프는 아직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생들의 영원한 '동심공간' 문방구

문방구는 유혹의 장소다.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쫄쫄이와 아폴로, 꾀돌이, 단내를 풍기는 달고나와 떡볶이, 아이돌 원조 'HOT'와 '젝스키스' 사진까지. 다양한 잡동사니가 가득 찬 문방구에서 나는 주머니를 털어 동전을 꺼냈다. 돈을 다 쓰고 나면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워 뽑기나 오락기를 두드리는 친구 주변을 기웃거렸다. 100원으로 할 수 있는 게 참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과자 두 봉지, 뽑기 한 판, 밀가루 떡볶이 한 개, 연필 한 자루가 모두 100원이었다. 물건값이 오르고, 스타 사진 속 인물이 변해도 문방구의 '주인'은 여전히 초등학생이다. 대형마트에 밀려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문방구들. 유년시절의 추억을 붙잡으러 '문방구 기행'을 떠났다.

◆이름처럼 영원히 젊어라, '영문구사'

대구 중구 동인초등학교 앞에는 문방구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어서 눈에 띄지만 육교 밑에 자리 잡은 문방구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소외된 곳에 더 마음이 갔다. 바깥에 뽑기통도 없고, 평상에 늘어놓은 과자도 없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컴컴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냈다. "계세요~?" 초등학생이 아니어서 놀랐는지 주인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어두컴컴한 문방구 안은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하다. 1등에 당첨되면 햄스터를 주는 '종이 뽑기'는 색이 바랬고, '매직 반지'가 잔뜩 든 뽑기통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변한 것은 과자 이름과 가격뿐이다. 아폴로는 아팟치가 됐고, 한 봉지에 50원 했던 꾀돌이는 200원이다. "요새 50원짜리 과자는 없어. 그래도 꾸준히 제일 잘 나가는 거는 아폴로지. 나도 이 이름이 입에 이름이 붙었네." 못 보던 과자도 있다. 생김새는 쫄쫄이랑 비슷한데 이름은 '네모스낵'이다. 뜯어서 먹어보니 불고기맛이 난다.

올해 72세인 할머니는 29년째 이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다. 원래 학교 정문 앞에서 장사를 했지만 10년 전 이곳으로 옮겼다. 문방구가 떠난 자리에는 지금 옷가게가 영업 중이다. 할머니는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부끄러워서 안 돼"라고 하며 이름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지만 문방구에 얽힌 추억만큼은 술술 풀어놓는다.

"옛날 애들은 정이 많았어. 쥐포 같은 거 연탄 난로에 구워서 같이 먹고. 단골 애들하고 친했어. 한 10년 전인가. 우리집에 자주 왔던 여자애가 다 커가지고 결혼한다고 왔지 뭐야. 옛날에는 병아리, 금붕어도 팔고 토끼, 햄스터도 많이 팔았어. 병아리를 닭으로 길러서 잡아먹었다는 애들도 있고. 이런 재밌는 이야기가 많지."

◆월세도 못 건지는 문방구, 그래도 애들이 좋다

문방구는 돈 되는 장사가 아니다. 대형마트와 대형 사무용품업체의 등장으로 요즘 문방구에서 학교 준비물을 사는 아이들은 드물다. 또 정부의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도 문방구의 설 자리를 위협했다. 이 제도는 아이들의 준비물을 챙겨줘야 하는 맞벌이 학부모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시'도교육청이 학습준비물 예산을 지원하면 각 학교가 공개입찰을 통해 준비물을 구매한 뒤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할머니는 며칠째 문구류를 하나도 못 팔았다. 월세 15만원을 메울 매상이 안 나온 지도 오래다. "옛날에는 한 학년에 11학급까지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3학급이 보통이야. 옛날에는 운동회 하면 물건이 많이 팔렸는데 한 3년 전부턴가? 이제는 큰 곳에서 다 한 번에 사는지 안 팔려. 저기 걸려 있는 훌라후프도 1년이 다 돼가는데 아무도 안 사가. 새 학기도 없어. 다들 대형마트 가서 뭉텅이로 사버리지."

하지만 문방구는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매일 오전 7시 30분에 문을 연다. 할머니는 여기서 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달서구에 살지만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중구에 있는 문방구까지 출근한다. "애들이 학교 바로 앞 문구점에 많이 가지. 여기는 단골 애들이나 올까, 손님도 별로 없어. 손이 큰 녀석은 한번에 1천원어치 과자를 사가기도 해. 적자 난 지 오래됐어. 그래도 건강관리도 하고 아이들 보는 재미에 계속 나오는 거지." 사진 촬영을 한사코 거부하며 웃던 할머니의 미소가 아이처럼 밝아 보이는 이유다.

◆문방구에도 유행이 있다

중구 삼덕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아름문구사. 이곳은 나름 '대형 문구사'다. 지난달 30일 오전 11시쯤 문방구가 한산한 시간을 골라 이곳을 찾았다.

추억을 파는 문방구지만 그 속에도 유행은 꿈틀거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가수 EXO 사진이었다. 기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유행했던 것은 '스타 책받침'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얼굴을 공책에 깔고 받아쓰기한 기억이 아련하게 났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도 대세다. 만화 주인공 '엘사'는 문방구 곳곳에서 인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겨울왕국 팔찌가 들어 있는 캡슐 뽑기를 하려면 거금 500원이 필요하다.

아름문구사 사장 권영주(46) 씨는 "요즘에는 EXO가 제일 잘 나간다. 사진 4장짜리 패키지가 1천원인데 초등학교 3~6학년 여자 애들이 가장 많이 사간다"고 귀띔했다. 그는 또 "한때 소녀시대, 빅뱅이 잘 나갔는데 요즘에는 찾는 애들이 별로 없다. EXO 브로마이드는 10권 들여오면 바로 빠진다. 매달 12일쯤 가져오는 것을 알고 애들이 찾아온다"고 문방구의 유행을 설명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도 있다. 우유곽에 든 아이스크림, 과자 꾀돌이는 요즘 초등학생들도 꾸준히 찾는다. 남편과 함께 문방구를 운영하는 김명자(38) 씨는 "요즘 제일 많이 팔리는 건 초콜릿가루 '제티'다. 애들이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흰 우유를 그냥 먹기 싫으니까 제티를 넣어서 먹는다. 하나에 200원짜리 제티가 하루에 서른 개 정도 팔린다"고 말했다.

문방구는 아이들에게 '훈련 장소'이기도 하다. 돈이 없을 때도 문방구에 널린 과자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문방구에서 과자를 훔치다가 걸린 아이들도 여럿 있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한 번씩 그런 유혹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주로 먹을 것을 훔치죠. 그래도 지난해에는 어떤 부모가 문방구에 찾아왔어요. 애한테 돈도 안 줬는데 연필이랑 연필깎이를 집에 가져왔다고요. 애가 훔쳐서 미안하다고 돈을 주고 가는데 참 고맙더라고요."

하지만 문방구의 풍경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오락기도, 달고나도, 떡볶이도, 슬러시도 없다. '먹거리 안전'을 강조하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자취를 감췄다. 매달 한 차례 이상 과자 유통기한과 위생을 점검하러 지자체와 학교 관계자들이 문방구를 찾는다. 김 씨는 "요즘에는 문방구에서 떡볶이 같은 분식을 못 판다. 애들이 찾기는 하지만 나라에서 팔지 말라고 하니 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언제까지 문방구가 학교 앞을 지킬지 알 수 없다. 지난해 7월 아름문구사 옆에 있던 문방구도 문을 닫고 떠나 지금은 문방구 2곳이 삼덕초교 주변을 지키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2003년 1천199곳이던 문구용품 소매업체(문방구) 수는 2012년 725곳으로, 500곳 가까이 줄었다. 학교 앞 문방구가 모두 사라지면 아이들이 공책 한 권을 사러 대형마트까지 가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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