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내 친구 천을산

우리 동네 고산동(孤山洞)에는 '외로운 산'이 하나 있다. 바로 키 낮은 천을산(天乙山)이다. 등산로 입구는 여러 군데가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은 오동나무가 있는 곳이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만나는 마지막 집 뒤에 오동나무가 있다. 그 집주인은 새벽부터 텃밭을 가꾸고 꽃모종을 옮겨 심으며, 집 단장에 여념이 없다. 날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등산객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오동나무를 지나면 포도밭이 펼쳐진다. 포도 익는 계절이면 천을산 전체가 달짝지근한 포도향기에 취한다. 포도밭 위에는 물빛 맑은 서당지가 있다. 아담하게 에워싼 천을산이 서당지에 고스란히 비춰지면 한겨울이다. 지금은 연초록 연잎으로 쫙 깔려 여기저기서 보드라운 이파리들이 손을 내밀며 등산객에게 손짓한다. 연잎 사이로 물고기 떼가 퍼덕인다. 새까맣게 몰려 있던 올챙이는 벌써 개구리가 되어 앞으로 펼쳐질 생애주기 설계에 바쁘다.

저 멀리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두 밭이 보인다. 한 두어 달만 있으면 입 안 가득 상큼한 자두 맛이 밸 것이다. 자두나무를 경계로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빼곡히 들어찬 나무는 태양을 이고 있다. 나무는 바람에게 말을 건넨다. 가슴에 묻어둔 슬프고 힘든 사연들을 비밀스럽게 고해바친다. 비 오는 날이면 짙은 초록 옷을 갈아입고, 눈 오는 날이면 눈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때로는 새들과 동물들의 은신처가 되어 안락함을 선사한다. 나무는 나의 소중한 벗이다.

주위에는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붉고 영롱한 보석들이 나를 보며 반짝인다. 아카시아 꽃은 이미 졌지만 오솔길 위에 흩뿌려져 꽃씨로 숨어버렸다. 내년 봄을 위해 깊은 휴식을 취하겠지. 나의 발길은 유독 바람이 많은 정자에 가 닿는다. 도란도란 둘러앉아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가 고개를 들면 작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팔공산 자락 저 멀리 갓바위 부처님이 아련히 하늘 끝으로 보인다. 이제부터는 정상이다. 정상으로 가기 전, 절벽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있다. 새색시마냥 혼자 함초롬히 핀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연보라색 자태가 서늘하게 아름답다. 정상에서는 벚나무와 목련이 등대처럼 불 밝힌 채 사람들을 맞이한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받아준다. 아기자기한 꽃나무로 치장한 정상은 작은 꽃동산이다. 가끔 벤치에 앉아 바람과 속삭이다가 다람쥐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천을산은 산책하기에 좋은 보석 같은 존재다. 산책은 화가에게 창작의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시인에게 시심(詩心)이 깃들게 하고, 심신이 부실한 사람에게는 건강을 찾아준다.

오늘도 산을 오르며 생각한다. 천을산, 네가 있어 참 좋다.

김남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