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잉어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 가
  • 가

김신용(1945~)

저 물의 만년필,

오늘, 무슨 글을 쓴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쓴 것 같은데 읽을 수가 없다

지느러미를 흔들면 물에 푸른 글씨가 쓰이는, 만년필

저 글은, 잉어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잉어처럼 물속에 살지 않고서는 해독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오늘도 무슨 글자를 쓴다

캘리그래피 같은, 그 변형된 글씨체로 무슨 글자를 쓴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닮은, 잉어의 얼굴

눈꺼풀은 없지만 깊고 그윽한 눈망울을 가진, 잉어의 눈

분명 저 얼굴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편지에 엽서에 무엇인가를 적어 내게 띄워 보내는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오늘

나는 무엇의 만년필이 되어주고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썼을

만년필,

수취인이 없어도, 하다못해 엽서라도 띄웠을

만년필.

그래, 잉어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겠지만

내가 네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편지를 받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깊은 잠의 핏줄 속을 고요히 헤엄쳐 온다

잉어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는, 편지가 아니라고

가슴에 가만히 손만 얹으면, 해독할 수 있는

글자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몸에, 자동기술記述의 푸른 지느러미가 달린

저 물의, 만년필--

-시집 잉어, 시인동네. 2013.

사람들은 잉어가 물속을 노닌다고 하지만 시인은 잉어를 물의 만년필이 되어 글을 쓴다고 한다. 잉어가 되어 보기 전에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역으로 시인이 쓴 시도 잉어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애는 잉어가 몸짓으로 글을 쓰듯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아닐까.

시인 kweon51@chol.com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26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서부전선 지뢰 폭발사고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김민석 의원을 비판했다. 이...
오픈AI의 AI 에이전트가 챗GPT 이용자의 이미지 53장을 외부에 무단 게시한 사실이 밝혀지며 조사가 진행 중이다. 정부는 석유 최고가격제...
울산의 한 중소기업 임원이 부하 직원을 2년 동안 수십 차례 추행하고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대구에...
브리핑 데이터를 준비중입니다..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