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편하게 듣는 클래식] 코렐리 '라 폴리아' D 단조, Op.5 No.12

조선 후기의 문인 이덕무(1741~ 1793)의 별명은 '간서치'였다. 책만 읽는 멍청이라는 뜻이다. 그의 자전적 글 '간서치전'에는 바둑이나 장기를 둘 줄 모르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독서를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배고픔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추운 겨울에는 덮을 이불이 없어 '한서' 한 질을 덮고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고는 행복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책을 단지 많이 읽는 것이 아닌, 책밖에 모르는 듯한 삶. 가끔 그의 일화에 묘한 동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나 또한 어쩌면 음악 듣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좋은 음반을 구하면 마냥 행복하고 음악을 들으며 종일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다. 다른 어떤 취미도 음악을 들을 때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굳이 명곡을 듣지 않아도, 화려한 것을 듣지 않아도, 늘 그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고 그것으로 또 어느 하루가 풍요롭게 채워진다. 오늘은 짧고 단순해 보이는 곡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코렐리(Arcangelo Croelli, 1653~1717)의 바이올린 소나타 Op.5 No.12번 '라 폴리아' 변주곡이다. '라 폴리아'란 하나의 아리아 선율을 주제로 잡아 이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시켜 만드는 변주곡 양식의 무곡으로 '광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주제 선율이 느리게 흐르며 시작되는 이 곡은 이후 느려졌다가 빨라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여러 기법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단순한 선율 하나를 수십 갈래로 파고드는 가운데 바이올린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중독성 있는 곡이다.

이 곡은 후대 작곡가들에 의해 여러 버전으로 재탄생했는데, 아마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바이올린 교본인 '스즈키 교본'에서 이 곡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원숙한 연주자뿐 아니라 바이올린을 막 배우는 어린 학생들도 연주할 만큼 폭넓게 사랑받는 곡이다. 또한 바이올린을 넘어 비올라, 전자 기타, 클래식 기타 등 여러 현악기로 연주되기도 한다. 비올리니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도 이 곡을 연주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차분하게 심연 속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비장미와 고전적인 무곡 리듬의 다채로운 선율을 표현한 연주가인 조르디 사발의 연주를 좋아한다. 또한 이 곡은 1913년, 피아노 독주곡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피아노 독주곡인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독특하고도 치명적인 서정적 세계에 '라 폴리아'가 빠져들어 만들어내는 울림은 듣는 이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다.

다양한 버전의 라 폴리아를 듣다 보면 10분을 조금 넘기는 짧은 바이올린 변주곡 하나가 품은 거대한 세상에 감탄하게 된다. 300여 년 전에 작곡된 곡이지만 아직 라 폴리아의 세계는 닫히지 않았다고나 할까. 물론 이것은 비단 라 폴리아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곡이 보여주는 무수한 가능성, 그 무수한 세계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되풀이해 듣는 것, 얼핏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내겐 당연하고도 행복한 일이다.

신동애(오디오 동호회'하이파이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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