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 속에서-초보 농군 귀촌일기] 그리고 그 앞

시골로 이사 오던 날, 꿩 한 마리가 우리 집으로 날아와 현관으로 들어가는 복도 유리창 두 장을 깨트리고 죽었다. 매에 쫓기던 꿩이 유리가 있는 줄 모르고 날다 그렇게 된 거였다. 즉사한 꿩은 마을 어르신들의 몸보신용이 되었고, 우리는 어르신들로부터 앞으로 닥칠 횡액을 꿩이 대신했다는 덕담을 들었다. 남편은 꿩이나 다른 새들이 날다가 부딪치지 않도록 새로 끼운 투명한 유리창에 진회색 시트지를 발랐다.

작년에 뒷마당에 있는 닭장에 중닭 열두 마리를 넣어 키운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닭의 체온이 남아있는 따뜻한 달걀을 먹게 될 날을 기대하며 아침저녁으로 사료와 채소 잎을 주고 깨끗한 물을 갈아주었다. 중닭들은 서너 달이 지나자 온전한 닭이 되었고, 그 사이 몸이 약한 세 마리가 죽어버렸다. 세 번째 죽은 닭을 뒷마당 구석 어딘가에 묻은 남편은 그 뒤부터 닭장에 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 자란 닭들을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남편은 닭을 잡을 줄 아는 사람에게 남은 닭을 모두 내주고 닭장을 없애버렸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양쪽 옆으로 논들이 이어져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 오른편으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좁은 농로가 길게 나 있다. 이따금 그 길로 경운기나 트럭이 드나들기 때문에 길 가운데는 뱀과 개구리가 죽은 채로 말라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매일 아침, 이 길로 산책을 다니면서 작은 동물들의 사체를 보는 일에 조금씩 무감각해져 가는 중이다.

시골에 들어와 살면서 우리의 삶 속에는 죽음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었다. 도시에 살 때도 이른 아침에 한길에 나갈 때면 간혹 로드 킬을 당한 동물들을 보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늘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삶의 이면은 금방 잊혀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생명이 나서 자라고 스러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며 생활해야 한다. 죽은 쥐 한 마리를 두고 서로 먹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까치들과 작은 새를 잡아먹고 있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켜갈 수 없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을 은연중에 체득해가는 것이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이 없는 무생물들은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한몸이었다.

땡볕이 땅을 파고드는 여름 한낮, 집 앞으로 검은색 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골목 끝에서 이어지는 산 어디쯤 망자를 쉬게 하고 내려오는 길인 듯했다. 올라갈 때는 슬픔을 떨치지 못한 얼굴들이었을 텐데, 내려가는 길이어서 그런지 옆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표정이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과의 이별이 삶의 한 모습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못했던 죽음을 이곳에서는 일상 속에서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언짢아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은 죽음과 마주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 또한 더 깊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화단에서 수돗가로 떨어진 개구리들이 다시 화단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말라 죽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작은 청개구리들을 위해 수돗가 한 편에 디딤돌을 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주변의 죽음을 보며 배우게 된 삶에 대한 경외심에서다. 마당 한 귀퉁이에 떨어진 작은 새의 깃털을 애잔한 눈빛으로 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삶의 뒷모습이 아니라 진행되는 삶의 가장 앞에 있는 모습이다. 나는 지금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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