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헐티재∼비슬산' 30리길…원추리·꿩의다리 들꽃 지천

비슬산 억새·야생화 평원에서 '가을 마중'

비슬산 정상엔
비슬산 정상엔 '가을의 전령' 억새들이 막 수술을 피워내고 있다. 억새풀 한쪽엔 야생화들이 산꾼들의 카메라를 유혹한다. 천왕봉에서 등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패랭이꽃 2.이질풀 3.잔대 4.천왕봉 억새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등산객들. 5.용연사
1.패랭이꽃 2.이질풀 3.잔대 4.천왕봉 억새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등산객들. 5.용연사

대구 근교 산을 묶은 '성삼비앞'은 지역 산꾼들의 작은 긍지다.

서울 종주 산행을 대표하는 '불수도북'(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의 2배쯤 되고 대전 산악인의 자부심인 '보만식계'(보문산'만인산'식장산'계족산)보다도 훨씬 길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에 지금은 마니아들이 알음알음으로 오르는 비밀 코스처럼 돼버렸다. 또 안다 해도 100㎞가 넘는 거리에 질려 아예 시도조차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회(回)에서는 성삼비앞의 핵심 헐티재~비슬산~천왕봉~용연사 코스를 소개한다.

산에 우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성삼비앞 250리길 풍광 중 알짜는 이곳에 다 몰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또 용천사, 대견사, 용연사로 이어지는 사찰 루트도 고승들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어 또 하나의 매력이다. 모두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고 경내에 드는 것만으로 깊은 치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앞산지맥의 숨은 비경 비슬산으로 떠나보자.

◆등산로 초입 용천사 물맛 유명=지난주 남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청도행 시외버스를 탔다. 경산버스 박석영 기사는 "오늘은 벌초 시즌이라 등산객들이 많이 없다"며 버스 시동을 건다. 평소 주말에는 서너 팀 등산객들이 이 버스를 타고 헐티재~통점령~우미산 코스나 비슬산 코스로 오른다고 한다.

한 시간쯤 달려 용천사 앞에 일행을 떨군 버스는 부리나케 풍각 쪽으로 내려간다.

부근에서 물맛이 가장 좋다는 용천사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보기 드문 석간수(石間水)인데다 얼마 전 우물에서 용의 사진이 찍혔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할매, 이 물을 마셔야 무병장수합니다." 한 스님이 노신도를 부축해 샘으로 모시고 가는데 노파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인다.

비슬산 등산로 들머리는 용천사 밑으로 100m쯤 떨어져 있다. 알프스산장 간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흙길을 한참 걸으면 주택, 상가, 별장들이 나오고 20분쯤 지나 본격적인 산책로가 열린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코스라서 등산객들은 거의 만나기 힘들다.

◆일연'도성'관기 스님 수도 터 비슬산=비슬산에는 '3용(龍)'이 있다. 용연사(龍淵寺), 용문사(龍門寺), 용천사龍泉寺)가 그것이다. 이 사찰들은 비슬산의 사방에서 불교 벨트를 이루며 지역 종교의 중심을 잡아준다.

용천사는 창간 당시 3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고 47곳의 말사를 두었을 정도로 번창했다. 대견사 초임 주지로 부임했던 일연(一然) 스님은 말년에 용천사를 중창하였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했다.

비슬산으로 오르는 길은 흐릿하다. 사방으로 숲이 우거져 조망이 가려진데다 등산로가 희미해 자칫하면 알바(등산로를 잘못 드는 일)를 하기 일쑤다.

중턱쯤에 시원한 계곡이 있어 숨을 돌리기에 좋다. 이 헐티재 길은 옛날 청도 풍각에서 달성이나 대구로 향하던 장꾼들의 쉼터였다. 짐꾼들은 여기서 요기를 하고 사찰을 오가던 동자승들도 발을 씻으며 여독을 풀었다.

정상 부근부터는 표지판이 잘 정리돼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숲에 가려 있던 조망이 열리면 종주 능선이 나오고 여기서 삼거리와 만난다. 왼쪽으로 가면 비슬산 참꽃 군락지를 거쳐 대견사에 이른다. 참꽃 군락지는 왕복 7㎞, 대견사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비슬산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저술 장소(군위 인각사와 함께)로 유명하지만 신라 고승 중에 도성(道成)과 관기(觀機)의 불교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1034봉 앞에 힘차게 솟구친 관기봉도 사실은 관기 스님의 존칭을 빌린 것이다. 두 도반(道伴)은 비슬산에서 지극한 우의를 남기며 교제했다. 후에 일연 스님이 두 고승의 행적을 따라 '찬포산이성관기도성'(讚包山二聖觀機道成)을 지어 삼국유사에 남겼다.

◆천왕봉으로 간판 바꿔 단 대견봉=비슬산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옛날 대견봉은 얼마 전 천왕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7년 달성군 일부 주민들이 여론 수렴 없이 정상석을 뽑아내고 대견봉 표지석을 세운 것을 국토지리원에서 17년 만에 바로잡았다.

훨씬 커진 정상석 주변엔 억새가 한껏 제 키를 키웠다. 아직은 줄기가 푸르고 수술도 반쯤 잎에 감춰져 있지만 곧 은빛 수술을 가을 햇살에 펼쳐 놓게 될 것이다.

키 큰 억새 옆에는 작은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꿩의다리, 산수국, 까치수염에 원추리까지 보인다. 여름에 노란 유혹을 뽐내던 나리꽃도 이제 마지막 정염을 내뿜는다.

억새밭마다 가을 추억을 렌즈에 담으려는 등산객들이 포토존을 이루었다. 산 밑을 점령한 스마트폰의 위력은 산 위에서도 막강하다. 디카나 덩치 큰 DSLR을 몰아내고 카메라 시장을 독점해버렸다.

오늘 렌즈에 잡힌 풍경은 저녁 내내 친구, 가족의 카톡이나 밴드를 울려댈 것이다.

◆사명대사 호국 불교의 요람 용연사=천왕봉에서 억새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용연사 쪽으로 들어선다. 이제 길은 내리막길, 호흡이 한결 가볍다. 소로로 난 숲길을 1시간 반쯤 걸으면 좌측으로 용연사 표지판이 나오고 길을 내려서자마자 산길은 뚝 떨어진다.

용연사는 임란 때 소실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창했다. 당시 비슬산은 승병들의 최대 훈련장이었고 대사는 이곳에 기거하며 승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벌써 숲엔 땅거미가 밀려들었다. 어둠이 색(色)을 거두어가니 정신이 또렷해진다. 오랜만에 느껴본 평온이다. 혼자만의 상념에 맘껏 빠져본 것도 좋았다.

고승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길, 혼자 가면 성찰의 길이요 친구와 가면 우정의 노정(路程)이요 부부와 가면 '러브 로드'가 된다.

글 사진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대중교통으로 연결돼요=청도 풍각행 시외버스는 하루 세 번만 운행된다. 남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오전 9시 20분 차(요금 3천700원)를 타면 헐티재 용천사 밑에 이른다. 등산로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알프스산장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이 가장 수월하다. 용연사 버스정류장에는 달성2번이나 600번 시내버스가 온다. 막차는 오후 10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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