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도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할수록 사회와 개인은 점점 더 파편화되고, 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최근에는 취약 계층의 일자리와 복지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주기만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공동체'의 힘으로 해결하고 있다. 2012년 12월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기본법'이 처음 시행되면서 약 5천여 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되는 등 그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윤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회적기업들도 느는 추세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이 설립된 영국과 독일을 찾아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와 민간의 지원만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의 성공 사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또 대구경북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의미 있는 협동조합을 발굴해, 선진국형 공동체 운동의 성공 모델을 우리 지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공동체 운동의 시작, 영국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협동의 힘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우리 속담이다. 과거에도 우리나라에 계와 두레가 있었듯이, 어떤 사회나 다양한 형태의 협동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이 생긴 곳은 어디일까. 바로 영국이다. 맨체스터 인근의 작은 마을인 로치데일은 1840년대에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조합'이라는 협동조합이 설립됐다. 산업혁명을 겪고 있던 당시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노동 시간은 길고, 임금은 낮았다. 현대사회의 시장은 소비자 중심이지만 당시에는 공급자 중심이어서 상품 가격이 안정돼 있지 않았다. 또 상인들이 물건값을 속여 팔기 일쑤였다. 이때 가난한 노동자들 28명이 1파운드씩 출자해 생필품을 파는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당시 1파운드는 노동자의 반달 치 월급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노력과 신뢰를 발판으로 크게 성장했고, 현재 전 세계 협동조합의 조상이 됐다.
이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은 공동체 운동의 뿌리가 깊은 나라다. 영국 런던에 있는 '로컬리티'(Locality)는 지역 주민들이 공동체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단체로 2011년 4월에 탄생했다. 1992년 시작된 마을 만들기 사업체 연합(The Development Trust Association)과 영국에서 정착 운동을 펼쳐온 100년 역사의 BASSAC가 합병해 출발했다. 현재 영국(잉글랜드)에만(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제외) 500여 개의 회원 단체가 있고, 22만5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는 대형 단체다.
◆황폐화된 항구, 공동체의 힘으로 되살리다
활력을 잃고, 죽어가는 마을을 되살리는 것이 로컬리티의 역할이다. 이들이 되살린 마을은 수도 없이 많지만 최근 영국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은 지역은 영국 남부의 작은 해안 마을인 헤이스팅스(Hastings)다. 로컬리티 개발 담당관인 크리스털 주어링 씨는 "헤이스팅스 항구는 과거 영국에서 아주 인기있는 휴가지였지만 1990년대에 태풍 피해를 당하며 항구가 황폐해졌다. 이후 2010년 화재 때문에 거의 95%가 파괴됐지만 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관광 도시로 되살린 성공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마을을 되살린 것은 주민들의 참여와 애정이었다. 볼품없이 망가진 항구는 지역 주민들의 심장이었다. 그곳은 만남의 장소였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곳에 모여 춤추고 노래한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2006년 이후 헤이스팅스 주민들은 항구를 되살리고 싶다는 공통 의견을 모았고, 헤이스팅스 의회도 이를 지원했다. 이 항구를 재건하고 개발업자들로부터 사들이려고 지역 주민들은 복권 기금(Lottery fund)를 조성해 약 1천1백만파운드(우리돈 약 186억6천300만원)를 마련했다.
당시 항구는 파나마에 등록된 개발 회사에 넘어간 상태여서 개발업자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끈질긴 법적 투쟁 끝에 2013년 8월 강제 구매 요청이 실행됐고, 헤이스팅스 주민에게 항구 소유권이 넘어갔다. 주어링 씨는 "앞으로 항구가 개발되면 매년 35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돼 마을이 옛 명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남부의 라임 레지스(Lyme Regis)도 성공 사례로 거론되는 마을이다. 라임 레지스 해안은 화석이 많이 발견돼 '쥐라기 해안'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관광객을 끌어들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민들이 지역을 되살리기 위해 택한 것은 마을의 가장 큰 자산인 화석과 해안이었다. 화석 정보를 모은 박물관을 세운 뒤 지리학자와 해양생물학자가 해안을 함께 걸으며 안내하는 '화석 워크 투어'를 개발해 외지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현재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지역의 지리학과 고생물학 정보를 담은 스마트폰 앱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있다.
◆'작은 정부' '큰 시민 사회'가 공동체 살린다
영국 정부도 시민 사회의 주도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국가가 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을 시민 사회로 이양하면 장기적으로 복지 예산 지출이 줄어드는 숨은 이점도 있다. 정부 지원 프로그램인 '공동체 오거나이저'(Community Organiser)가 대표적이다. 오거나이저의 역할은 세 가지다. 각 마을에 가서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고, 지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찾아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여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로컬리티 관계자는 "이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으로 가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은가?'라고 이웃들에게 묻는다.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서 '어젠다'를 형성하는 것"이라며 "오거나이저들은 보통 1년간 훈련을 받는 데 수료한 뒤에도 추가 훈련을 별도로 받는다"고 설명했다.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 운동은 법으로도 보호받는다. 2011년 영국 국회에서 '지역주권법 시행령'(Localism Act)이 통과됐다. 이 시행령은 중앙 정부의 힘을 빼고, 지방 정부와 지역 사회에 더 많은 권한을 줘 공동체 활성화를 장려한다. 여기에 기반을 둔 공동체 권리는 크게 네 가지로 ▷공동체 입찰권(한 마을에 지역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 매물로 나오면 이 거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공동체에서 이를 사들일 준비를 하는 것) ▷공동체 건축권(마을 공동체가 새 상점이나 주거 시설들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복잡한 건축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공동체 도전권(마을 공동체가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스스로 지역 서비스를 운영할 수 있는 권한) ▷지역 계획(지역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마을의 개발 계획에 참여하고, 결정할 기회를 제공함)이 있다.
이미 거대 도시가 된 서울시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 운동을 영국에서 배우기 위해 로컬리티에 공무원 한 명을 파견했다. 서울시청 파견 공무원인 전영우 씨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영국은 중앙 정부가 가진 권한과 서비스를 시민 사회로 계속 넘기고 있다"며 "또 영국은 자생적으로 시민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마을 공동체 운동에 지속성이 있어 우리나라가 배우고 참고해야 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글 사진 영국 런던에서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 협동조합이란? 공동의 필요를 기반으로 재화와 용역의 구매와 생산, 판매, 소비 활동을 협력하는 사업체. 주식회사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지만 협동조합은 공동의 필요를 충족하고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협동조합은 출자 금액과 상관없이 1인 1표가 원칙이다. 한 명이 하나의 의결권과 선거권을 갖는다.
※ 사회적기업이란? 비영리조직과 영리기업의 중간 형태로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다.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육성법'은 취약 계층에게 사회 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해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영업 활동을 하는 기업을 사회적기업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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