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 칼럼] 가난한 사람들

우리 사회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태초부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류가 수렵 채취 생활을 하던 때에는 공동체 안에서 빈부의 격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면서 차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확연히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1960, 7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사람이 가난했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과거보다 많이 좋아졌으나,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듯이 재화도 극소수 부자들의 손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면서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리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난해지면 가난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심지어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고,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며(시편 40,18; 70,6; 86,1; 109,22.)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왕과 지도자를 세웠습니다.(시편 72) 예언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이들의 권리를 세워주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자신이 일치(마태 25,40)함을 밝히셨고,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당신을 따르고(마르 10,21)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는 조건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루가 18,22)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시대의 예언자로 살아야 하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저 믿는 것만이 아니라 전 인격을 바쳐서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보호자란 사실을 믿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부해짐에 따라 가톨릭교회 역시 중산층화가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중산층화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물질주의, 배금주의는 하느님마저 몰아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교회에는 하느님이 머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표지로, 믿는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징표인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터전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한 자들 앞에서 먼저 정의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의 원인인 불의와 부정을 제거하려 노력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시혜자로서가 아니라 이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되기를 바란다면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일치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모범에 따라 가난한 교회,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 길이 비록 어렵더라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이 있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김명현 신부/대구 비산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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