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학의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에서 고대 페르시아부터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존재했던 초강대국들이 가진 공통점은 관용이라 했다. 관용은 제국의 등장 조건임과 동시에 몰락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로마제국의 경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관용이 살아있을 때 초강대국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민족들의 동화가 실패로 돌아가고 불관용이 득세하면서 로마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지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현대적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전략적인 개념이다. 이민족의 문화를 용납하고 길을 열어준 것이 초강대국 형성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한국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수성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와 관용은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결과, 한국기독교는 분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다보니 분열하는 교회상을 낳고 말았다.
하지만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만해도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와 무관하고 구원과 상관없는 교리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조금씩 '무지'로 인해 '마음에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은 왈도파나 보헤미안 형제들과의 교제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초교파적 관용을 보였다. 역사가들이 칼빈을 두고 왜 '연합주의자 칼빈'이라고 일컫는지 알만하다. 칼빈의 이러한 태도는 작금의 칼빈주의자로 자처하는 보수적 한국기독교의 현실과 얼마나 다른가?
최근 필자가 속한 장로교 교단 총회에서 그동안 인정해오던 로마천주교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로마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결정은 교회의 역사나 현실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로마천주교와 기독교의 신학적 상이성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인정되어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는 로마천주교에서 베푼 영세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로마천주교의 신학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재세례를 반대해 온 교회의 기본적인 전통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생 동안 재세례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한 고대 교부들의 신학전통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름으로 내리는 신학적인 결정들은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충분한 신학적인 검토 없이 한두 번의 공청회 정도만으로 소위 '우리의 신학'을 규정지으려는 가벼움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성경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립보서 4:5)고 명령하고 있다. 이 명령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물론 관용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라는 다원적인 뜻은 아니다. 하지만 보수성이 배타성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교회의 정통성이 가지는 넉넉함과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움이 나와 다른 사람과 문화, 생각을 포용하고 조화와 균형을 창출할 능력을 갖는다. 변화무쌍한 시대에 한국기독교가 '관용'의 리더십을 백분 발휘해 진정한 세상의 빛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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