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티 타임과 손수건, 29%

주변에 '나라 꼴이 이게 뭐냐'는 사람이 많다. 박근혜정부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독일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고 말한 헤겔(1802년 '독일 헌법에 관하여'라는 시론의 첫 문장이다)처럼 "대한민국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고 외치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소리다. 요즘처럼 정치'정부 무용론이 설득력을 얻은 때가 또 있었나 싶다. 침 마를 새도 없이 말이 바뀌고 정책은 하루아침에 뒤집어졌다. 안방 드라마 표현대로 '멘탈이 남아나지 않아'다.

정부와 정치가 국민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지금의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다. 근년에 '원칙과 신뢰를 금쪽같이 여기는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무척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원칙의 정체가 뭔지, 무엇을 향한 신뢰인지 되묻는다면 혀가 꼬이고 답이 궁해질 사람 많을 것이다. 대통령의 수첩에 원칙은 온데간데없고 '지정 노선'만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망원경이 아니라 두꺼운 돋보기만 굳게 쥔 모습이 어른거린다. 보고 싶은 것만 깨알같이 들여다보니 멀리, 넓게 보려야 볼 수가 없다.

정권인수위 때부터 이어진 인사 난맥은 '십상시 찌라시' 파동으로 정점에 달했다. 될성부른 나무도 아닌데 떡잎을 보라며 대충 짜맞춘 소득세법 개정은 '13월의 세금폭탄'이 아니라 정권의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몇 년을 다듬고 조율했는데 일언반구도 없이 백지화된 건강보험료 개선은 청개구리 삼신이 들린 꼴이다. 이런 실정(失政)이 그냥 헛발질이라면 용서가 된다. 그러나 국민은 이미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인 꼴이라 이해는 몰라도 용서는 불가다.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의 직책은 권력을 이양받는 자리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권한과 사무를 위임받은 자리다. 시쳇말로 '5년 계약직'이다. 조금 특수한 '을'(乙)이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경영이 서툴거나 사무가 엉망이면 계약 만료 이전에 결국 얼굴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그게 지지율 29%의 의미다.

박 대통령은 지난주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영화를 봤다. 1천만 명을 넘겼다는 '국제시장'이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고단한 현대사와 어려웠던 우리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흘린 눈물이다. 손수건도 준비했단다. 하지만 그 '눈물 소통'은 번지를 잘못 찾았다. 일반 관객은 몰라도 국가지도자라면 과거나 스크린에 눈물 적셔서는 안 된다. 설령 눈물이 넘쳐도 남몰래 속으로 흘리는 눈물이라야 맞다. 정작 눈물을 흘릴 곳은 극장 바깥에 있다. 지금의 국가 상황, 어려운 현실에 좌절한 국민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다. 그래야 공감을 얻는다. 공감은 국정을 이끄는 힘이다.

안타깝게도 청와대의 국가경영 수준이나 정부'국회의 정책 수행 능력은 공감과 거리가 멀다. 국가정책 결정의 투명성은 세계 최하위권이고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베트남'우간다보다 낮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4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나온 결과치다. 국가 중요사를 오락가락 처리해놓고 '뒷북 소통'한다고 낙제점이 급반등할 리 없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5 대한민국 공무원상 및 국가 시책 유공자 시상식장에 '당신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공무원입니다'라는 걸개가 붙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한 많은 공무원에게는 합당한 찬사다. 그러나 청와대를 위시해 윗사람 눈치나 보며 따라해 온 '앵무새'들은 제외다. 이런 앵무새를 두더지 잡는 뿅망치로 두들긴들 목소리가 달라지고 고개를 떨굴까.

2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반환점을 아직 넘지도 못했는데 벌써 레임덕 소리가 나오는 것은 참 민망하다. 신뢰를 얻지 못해 '관료들도 일제히 태업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판은 크게 깨졌다. 티 타임 자주 갖는다고 더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가 그 해법도 제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정책과 인사, 리더십으로 국민과 소통하면 된다. 검증되지 않은 조리법과 지정 노선으로 계속 국민 입맛을 바꾸려 든다면 남은 3년은 보나마나다. "대면보고 더 필요하세요"라고 또 묻는다면 글쎄, 국민은 마른기침만 크게 뱉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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