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전이나 인문학 서적을 뒤적거렸지만 완전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본에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라는 어휘 자체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문학을 한자로 '人文學'이라고 씁니다. 사람 '人', 글월 '文'. 어떤 사람은 '文'을 '紋'으로 읽어서 인문을 '사람의 무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인문학은 '사람'이 기본적인 기준이 됩니다. '文'은 넓은 의미로는 '읽고, 말하고, 쓰는' 모든 활동을 지칭합니다. 좁게는 글이나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을 대상으로 하면서 글과 책을 활용한 모든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훨씬 편해졌습니다. 아침독서를 비롯해서 글쓰기, 논술, 책쓰기, 토론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그와 관련된 정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책의 이면에는 관통하여 흐르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1+9=?'보다는 '?+?=10'의 답을 찾는 과정이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답이 아니라 다양한 정답, 아니 질문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정말 운명처럼 '논어'에서 이 말을 만나게 됩니다.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절실하게 질문하고 가까운 문제부터 생각한다'는 단순한 말이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切問'이라는 말이 절실했습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존재는 동물, 질문이 있는 척하는 존재는 속물, 질문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유령, 질문을 파괴하는 자들은 괴물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질문하는 존재'가 되겠지요. 결국 인문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질문하는 존재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G20 정상회담이 열렸었지요. 그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강연을 끝내고 정상회담 개최국인 한국 기자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자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영어로 질문하는 것이 어려우면 한국어로 질문하면 통역해줄 거라고 농담까지 합니다. 그래도 한국 기자들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기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화면을 보면 회견장에는 한국 기자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때 중국 기자가 나서서 자신에게 질문권을 달라고 합니다. 오바마는 이미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주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중국 기자는 한국 기자들에게 물어봐도 되냐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한국 기자들은 침묵합니다. 결국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은 여러 나라에 생중계되고 있었고 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왜 한국 기자들은 질문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EBS에는 질문 자체를 두려워하는 한국인의 속성에 대한 문제, 질문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고 있지만 훨씬 복잡한 문제들이 그 속에 존재했을 겁니다. 기자들은 동물이기도 했고, 속물이기도 했고, 유령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수많은 '괴물'들이 기자들의 질문을 방해했을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연수를 진행하다 보면, 또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수없이 목격하는 것이 질문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입니다. 저 정도의 사안으로 질문하느냐는 시선, 뭐가 잘나서 또 질문하느냐는 시선, 특히 연수나 수업이 끝날 무렵에 질문하는 사람은 모두의 공적이 됩니다. 연수나 수업을 통해 배워야 할 내용보다는 연수 시간 그 자체, 수업과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사고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인간의 본질은 당연히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질문이 사라진 곳에는 학문도, 그 학문을 통한 사회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질문'은 인문학 정책이 걸어가야 할 가장 핵심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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