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분노의 윤리학

미모의 여대생이 살해되었다. 룸살롱에서 일하던 호스티스이기도 했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네 남자의 존재가 드러난다. 겉보기에는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 남자는 여대생의 옆집에 살면서 사생활을 도청하던 경찰이다. 또 한 남자는 깨어진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스토킹을 일삼던 옛 애인이다. 또 한 남자는 삼촌을 자임하며 여대생을 상대로 돈놀이하던 사채업자이다. 마지막 한 남자는 아내 모르게 여대생과 불륜관계를 맺어온 대학교수이다.

"난 남한테 피해 준 적이 없어" "난 사랑한 죄밖에 없어" "난 열심히 돈을 벌었을 뿐이야" "아내만 모르면 아무 문제없어"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여대생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모두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은 도외시한 채 타인을 향해 분노하고 응징하려 든다.

염탐하던 여자가 죽어서, 다른 남자에게 여자를 빼앗겨서, 돈을 받지 못해서, 정부를 잃고 누명까지 써서 분노에 차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대생을 이용했지만, 아무도 내 탓이라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네 탓이다. '분노의 윤리학'이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영화 속의 장면뿐만 아니다. 현실에서도 '분노의 윤리학'은 익숙하다. 여자 친구가 결별을 선언했다고 승용차로 들이받고, 돈을 안 준다고 칼부림을 한다. 운전을 방해했다고 상대 차량을 삼단봉으로 내리치고, 주차 시비 끝에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홧김에 청와대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고, 홧김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른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태도, 어린이집 폭행사건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이른바 '홧김 범죄'이다. 보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분노 조절 장애'가 원인인 사건들이다. '분노 사회'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평범한 이웃이 벌이는 홧김 범죄를 보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피해를 당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가정의 해체나 실직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겨운 사람들에게 화가 쌓이고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사회적인 여건들도 자꾸만 분노를 양산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홧김 범죄가 늘어나는 근본 원인으로 우선 자기중심적인 성장 환경을 꼽는다.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크면서 남을 배려하는 학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를 스트레스가 누적된 '불안증폭 사회'로 규정하고, 우발적 범죄 증가의 원인을 외환 위기의 경험에서 찾기도 한다.

가장들이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무더기로 쫓겨나는 사태는 경제적인 거세(去勢)의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이 만성적인 불안과 스트레스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사회, 패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실종된 각박한 공동체에서 좌절과 분노는 누적된다. 게다가 애초에 자제력마저 부족하니 조그마한 자극에도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짜증과 불안만 안겨주는 정치판에다 계속되는 불경기와 치솟는 물가, 입시경쟁과 취업난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진 자들의 탐욕과 오만, 가난한 사람들의 좌절과 불만, 그리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초래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우리 사회가 분노를 키우고 있다. 세상의 냉대와 상실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타인의 목숨까지 무차별적으로 앗아가는 것은 비인도와 반인륜의 극치이다. 홧김에 서방질해도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와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분노가 확산되면, 모두가 가해자요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 한국 사회는 분노를 절제하고 이성을 되찾기 위한 심호흡이 필요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의 부활이 절실하다. 나아가 가정과 학교의 자정 기능을 회복해야 하고, 스트레스와 박탈감을 다스릴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분노의 윤리학'은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는 인식과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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