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흰 비닐봉지 하나,
자늑자늑 바람을 껴안고 나부낀다.
바람은 두어평 담 밑에 서성이며 비닐봉지를 떠받친다.
저 말없는 바람은 나도 아는 바람이다.
산벚나무 꽃잎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때, 눈물 젖은 내 뺨을 서늘히 어루만지던 그 바람이다.
병원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속수무책 깍지 낀 내 손가락들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던 그 바람이다.
(……)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창비. 2013)
자늑자늑한 바람이란 가볍고 부드러우며 차분한 바람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 기다리는 따뜻한 봄날의 바람이기도 하고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우리가 위로받고 싶은 그 바람이기도 하다. 내가 눈물 흘릴 때, 내가 고통으로 참담해질 때 바람은 나를 쓰다듬으며 어루만져 준다. 우리는 그 바람이 익숙하다. 내가 홀로일 때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바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늘 반복해서 기도하던 그 바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바람. 그 바람은 나를 허공으로 떠받친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 바람을 껴안고 나부낀다고 생각한다. '제 몸 비워버린 비닐봉지'는 바람을 가슴에 품고 '적요한 독무'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비닐봉지를 떠받치는 것은 바람. 두 번째 연의 '바람은……떠받친다'가 없어도 시는 살아나고 덜 불편했을 텐데 시인은 왜 굳이 이 서술을 끼워 넣었을까?
'나도 아는 바람'은 모두의 바람이다. 모두에게서 오는 바람이고 모두에게로 가는 바람이다. 나는 우리의 나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관계체성이라고 불렀다. 시인이 눈물 흘리고 쪼그려 앉아 고통스러워할 때 낯익은 바람이 자늑자늑 위로해 주듯이 이 삶도 서로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적요한 독무'는 나도 아는 모두의 바람을 마음을 비우고 팽팽하게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시인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