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풍양속이 자칫 노이로제 되기 쉬워
추석'김장철'설 '지옥문'으로 희화
타자 향한 존중 없는 의식은 빈 껍데기
감사'화목, 명절 아니라도 할 수 있어
언제부턴가 헬 게이트(hell gate:지옥문)란 용어가 온오프라인 상에 회자한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같은 개인적 재난이 닥치기 전을 희화화한 표현인데 이 지옥문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1년에 세 번 이상 열리는 것 같다. 17년 채 안 되는 미천한 진료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추석, 김장철, 그리고 설을 기점으로 대략 2주 전후가 매년 심리적 불안의 정점을 찍었다. 응급실을 갖춘 병원은 갑자기 북새통이 되며 평소보다 심인성(心因性) 질환의 빈도가 높아진다. 정신건강의학과의 개입이 바빠질 수밖에 없으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은 회생 가능한 시기를 지나 만신창이가 된 채로 뒤늦게 찾아온다. 명절 후 이혼율이 높은 건 이제 기본이고 형제나 부부간의 해묵은 갈등이 폭발하여 심지어 칼부림이 나기도 한다. 기분 좋아야 될 명절이 도리어 각자의 명(命)을 절(絶)하는 날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 중 일부는 이 시기가 불편한 나머지 해외여행을 가거나 평소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직장을 제 발로 찾기도 한다. 풍습이 사람보다 위에 있고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점, 바로 그곳에 명절의 헬 게이트가 있다.
명절 스트레스를 논할 때 흔히 돈이나 '시월드'(시댁)가 원인으로 몰린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그저 매개체에 불과하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지 못할 때 무너진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극도의 분노, 격노(激怒)가 타오른다. 거의 모든 스트레스의 씨앗인 화(火)는 결국 관계, 사람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한 예로 아무리 험한 환경에서도 마음 편히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매사 짜증과 근심에 사로잡혀 진료실을 찾는 분들이 있다. 아니, 아주 많다. 이분들이 눈물을 훔치며 아픔을 토로하는 배경은 한결같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영화배우 윌 스미스는 에서 위험은 상존(常存)하나 두려움은 선택이란 말을 남겼다. 실체가 불확실하면 두려움의 영향력 또한 비대해진다. 거기다 보편성과 저마다의 죄책감까지 가미되면 범인(凡人)들은 꼼짝달싹 못한 채 불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풍습이 악습(惡習)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소중한 이의 영혼을 무시하면서까지 악습을 반복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불안과 반복되는 강박을 야기하는 의구심(疑懼心) 때문이다. 이 녀석이 마음속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한 옆 사람 마음은 절대로 안 보인다. 허상의 불안을 감소시키는 데만 온통 혈안이 되어 있다. 이번 설은 댁에서 그냥 쉬시라고 권유해도 "그래도 설인데 어떻게…"라고 답할 뿐이다. 풍습의 요소 중 하나인 제의(祭儀)는 정신의학에서 리추얼(Ritual)이라 불리는 강박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자칫 미풍양속이 노이로제적 성격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뜻이다. 강박 성향이 팽배하면 원리 원칙뿐 아니라 순서에 대한 집착 또한 커진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반려자가 다 죽어가도 꼭 시댁부터 먼저 찾은 뒤 친정에 가야 한다며 난리를 치는 심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서로 뜻이 맞고 정답다'는 화목(和睦)이란 가치를 철저히 훼손하는 것이다. 단지 제 마음 편하고자 주변 여러 사람에게 가하는 일방적 강요는 엄연한 정서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풍습을 지키는 원동력이 사람을 향한 존중이 아니라 의구심이면 곤란하다. 타자(他者)를 향한 숭고함이 없는 의식(儀式)은 그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불안을 감(減)하기 위한 개인적 속죄행위에 소중한 사람을 착취하는 기이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에는 귀신도 안 찾을 것 같다.
조상님께 감사함을 표현하고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가지는 게 명절의 본질이라면 그날은 음력 새해 첫날뿐 아니라 오늘 혹은 내일이 되어도 좋다. 상대방과 합의만 된다면 거의 매일을 명절로 삼을 수도 있다. 약속은 상대방과 나와 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풍습과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김현철/정신겅강의학과 전문의
댓글 많은 뉴스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단독] 국민의힘, '보수의 심장' 대구서 장외투쟁 첫 시작하나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
정동영 "'탈북민' 명칭변경 검토…어감 나빠 탈북민들도 싫어해"
지방 공항 사업 곳곳서 난관…다시 드리운 '탈원전' 그림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