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한국 정치사의 풍운아 성곡 김성곤(1913~1975) 선생이 타계 40년 만에 고향인 달성군 구지의 선영으로 돌아왔다.
23일 대구 달성군 구지면 예현리 김해 김씨 문중 선영에서 성곡 선생의 장남인 김석원 전 국회의원을 비롯한 유족들과 김문오 달성군수 등 각계각층의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곡 김성곤 선생 4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성곡 선생은 지난 1975년 2월 향년 62세로 타계하자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됐다. 이후 1984년 강원도 평창으로 옮겨졌다가 40년 만인 지난해 10월 31일 선생이 나고 자란 달성군 구지로 재이장됐다.
쌍용그룹 창업주인 성곡 선생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을 맡았고, 1965년 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이 되면서 정치'경제계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이 당시 성곡언론문화재단과 성곡학술문화재단을 창립해 언론창달과 학술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국내 언론계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1952년 동양통신을 설립하고 1954년 연합신문을 인수해 사장이 됐다. 1961년에는 국제신문협회(IPI)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제7, 8대 국회의원에 잇따라 당선돼 공화당의 이른바 '당 4역'으로서 집권정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세칭 '10'2항명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공화당 당직과 국회의원직을 내놓는 중징계를 받고 정계를 떠났다.
이후 선생은 1969년 쌍용양회'쌍용산업 회장,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 1974년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재개했으나 1975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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