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야곱 신부의 편지'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속 야곱 신부님은 앞이 보이지 않으셨지만 당신 앞으로 배달되는 수많은 편지를 읽고(편지 읽어주는 봉사자가 있었음) 그 편지에 담긴 사연에 따라 기도를 하며 살고 계셨습니다. 이미 삶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것처럼 숲 속에 홀로 계셨지만 마치 '나의 전생은 당신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는 표현도 있듯이 그들 곁에 함께 있는 것처럼 귀담아들어 주셨지요. 그분의 영혼에는 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왠지 모르게 요셉 신부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영화 속의 그분과 신부님의 온화함이 겹쳐져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신부님의 은퇴 후 모습에 대한 저의 엉뚱한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례길에서 저희에게 빛의 시간과 그림자의 시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요. 그날 저는 빛의 시간만을 고집하는 저의 옹색함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요. 빛의 시간이란 결국 그림자의 시간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임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빛을 향해 손을 내밀기만 했습니다. 그림자를 받아 안을 줄 모르는 손에 빛이 들어서기라도 할까요. 빛과 그림자가 같은 날 태어나서 같은 시각에 죽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제 삶 또한 눈부시길 바라지만 그림자 없는 빛 또한 잡히지 않는 허상이겠지요. 내게 그림자의 시간은 언제였는지, 누군가를 위해 그림자가 되어 준 적은 있는지 되물어 봅니다. 어쩌면 항상 빛이었지만 빛을 보지 못한 때가 더 많았으며, 그림자 안에서 그림자를 지우려고만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릅니다. 어쩌면 빛과 그림자는 암수가 한몸인 자웅동체처럼, 빛은 그림자를 먹고 그림자 또한 빛을 먹고 일어서겠지요. 세상의 이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랫동안 저 편한 대로 빛만 찾아 헤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에 머무는 빛과 그림자의 길이는 언제나 같음을 그날 새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순례길에서 우리가 함께 마주 본 나무 십자가의 무게는 각각 달랐지만 당신은 그것을 함께 들어주려고 하셨고, 당신의 말씀이 혹은 당신의 말 없음이 어떤 테두리를 만들어 저의 등을 토닥거려 주셨지요. 시 앞에서는 '좀 더 간절하게, 더 절박하게, 친절하게'라고 거듭 다짐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만 합니다. 꽃도 한 가지 안에서 피는 순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꽃나무의 봄 가지처럼 가지에서 가장 멀리부터 당신을 맞이하고 싶은 날입니다.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도 벗어 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의무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다 말씀드리지 못한 그 밖의 것들을 사순절에 받아 안으며 '키리에, 키리에' 그림자의 시간을 기꺼이 견뎌내겠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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