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사후 항우와 경쟁하며 진나라를 정복한 한고조 유방이 처음 시행한 정책은 진나라의 잔인하고 복잡한 법령들을 모두 즉시 폐지하고, 우선 법삼장(法三章) 즉 사람을 죽인 자, 상해한 자, 도둑질한 자를 처벌한다는 규정만을 남김으로써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신생독립국가로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법률을 시행해 온 지 어느덧 70여 년이 흘렀다. 진시황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법치주의의 내실을 더욱 다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법은 국민, 더 나아가서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고, 인간의 복지와 행복한 삶을 증진시킴에 그 의의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행정의 편의와 시류에 편승하여 졸속으로 만들어진 수천 가지의 법률이 상존하고, 법률전문가들조차 그 체계와 적용범위를 잘 가늠할 수 없는 특별법이 난무하며, 공개적인 장소에서만 준수되고 은밀한 곳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법령 또한 즐비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법을 제정하거나 다루는 기관들은 직역이기주의 등 각종 이해관계에 얽매여 갖가지 예외조항을 만들고, 비정상적인 법 적용이나 해석을 통하여 법의 정신을 왜곡하는가 하면, 소위 법 지식을 독점한 전문가들조차 자기만족에 빠져 절차적 정당성을 도외시한 채 국민들에게 일방통행식으로 법을 강제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례는 궁극적으로 법의 권위를 훼손하고, 법 이외의 방법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를 분출시키며, 국민을 절망에 빠트리는 사태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법 혹은 법치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입법과정에 있어서의 신중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일시적인 여론에 떠밀려 자꾸만 새로운 법이나 강력한 처벌을 전제로 한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유사한 법이나 동종의 법 갈래를 정비하고 새로 정리하는 한편, 법 규정을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만들어 국민들이 법을 쉽게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법을 집행하고 해석, 적용함에 있어 국민들과 적극 소통하고 협력함으로써 법원의 판단 등과 국민의 일반적인 법감정과의 괴리현상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재판은 내용면에 있어서 당사자를 다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숙명이지만 최소한 절차적인 면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경청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만족감을 심어주는 것 또한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법은 여러 구체적 사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인 규정이므로 쉽게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법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이 법을 잘 알고 편리한 생활의 도구로 인식할 때 진정한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법이 너무 어렵거나 애매해서 자산가나 힘이 있는 사람들만 보호받고 무지몽매한 서민들은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며, 재수가 없는 사람만 법의 단속을 받는다는 인식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10여 년간 선진국의 문턱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문화의 융성이라 할 것이고, 그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법부는 국민참여재판의 시행, 법정 모니터링, 재판과정에서의 불편 사항에 대한 설문조사, 초'중'고교생들에 대한 법률교육 프로그램 참여, 조정제도 활성화 등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에게 다가가는 열린 법원을 지향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국민의 실질적인 재판권 보장을 위하여 사실심 충실화, 상고법원 설치 등 여러 가지 제도 보완을 추진하고 있다.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늘 '신독'의 마음가짐으로 국민의 생활을 힘써 보살필 것을 다짐해 본다.
신종화(대구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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