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망각할 자유와 기억할 의무의 사이에서:러시아 전승 70주년과 우리의 광복 7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1971년생. 경북대 노어노문과 석사(러시아 현대소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박사

러시아 종전 70주년 기념식 염려스러워

반쪽만의 축제로 新냉전시대 도래한 듯

광복 70주년 과거 잊어가는 대한민국

우리에게 과거를 망각할 자유가 있을까

러시아의 5월은 지루한 겨울의 흔적이 드디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찬란하게 꽃피는 시절이다. 그들은 '전승기념일', 자기네 표현대로는 '승리의 날'을 축하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에게 승리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러시아인들에게 큰 자부심이다. 러시아가 이날을 더 특별히 기념하는 것은 그들 영토에서 4년간 전면전을 치르며 민간인 포함 2천만 명이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전 유럽을, 아니 전 세계를 나치의 손에서 구했다고 자부한다. 서방 여러 국가에서처럼 5월 8일이 아니라, 독일이 따로 소련에 항복 서명을 했던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삼은 것도 그런 자긍심의 표현이리라.

10년 전, 종전 60주년 기념 승리의 날 행사를 모스크바에서 보았다. 붉은 광장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진 그날의 행사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를 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부시 대통령과 시라크 대통령 등 독일에 맞서 싸웠던 연합국 측만이 아니라, 이른바 적이었던 2차 대전 당시 '전범' 국가 원수들이 대거 참석한 것이었다.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 고이즈미 일본 총리,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 등이 초청받았는데, 이들은 고 노무현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더불어 2차 대전의 피해국인 서방 국가 원수들과 자리를 나란히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함께 웃으며 군사퍼레이드를 보고 푸틴과 악수를 했으며, 레닌 묘 앞에 마련된 단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라고 각국의 이해관계와 국제정세가 지금보다 복잡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행보는 정치적 현안은 접어둔 채, 과거에 대한 반성과 평화로운 공존의 미래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그것이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일지라도 말이다. 아나운서는 각국 원수가 입장하여 푸틴과 악수를 할 때마다, 침략국이면 그들이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 피해국일 때는 그들이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으로부터 어떻게 침략을 당했는지, 그리고 언제 '해방'되었는지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전범국에 과거는 기억해야만 할 의무임을 상기시키면서 거듭된 반성과 사과의 기회를 주고, 전승국에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각성을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올해 치러진 종전 70주년 기념식은 여러모로 염려스러워 보였다. 흡사 새로운 냉전시대가 도래한 듯 반쪽만의 축제로 그친 것이다. 초청을 받고도 참석지 않은 미국과 독일의 정상도 그러하고, 겉으로 그걸 무시하면서 가까움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행보도 그러하다. 게다가 일본은 전에 없이 미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전범국이 아니라 피해국인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공식행사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따로 러시아를 방문해서 나치 포로로 고통받았던 러시아 노인에게 끝없이 사죄하는 메르켈 총리와 비교할 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스러운 생을 마감하고 있는데도 사과는커녕 과거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일본의 행태는 더욱 우려스럽다.

하지만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오늘의 현실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과거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한 세기 전처럼 주변 강대국들은 국익에 따라 긴밀하게 짝을 지어 움직이는데, 북은 북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마치 구한말 시기처럼 서로 다른 형태로 고립되어 있다. 게다가 70년이 아니라 700년이 지나도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을 것이며, 수백 번의 사과로도 부족하다는 러시아인들과 달리,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를 잊어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과거를 망각할 자유가 있을까? 2차 대전의 피해국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인해 21세기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민족인 우리에게 말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역사는 나선형으로 반복된다'는 역사학자 비코의 말을 되새겨 볼 때이다.

윤영순/경북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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