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집 거실에는 낙타가 한 마리 있다. 꽤 오래전,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장 때 '데려온' 목제 조각상이다. 싸구려 기념품이지만 온 얼굴을 휘감은 터번 사이로 두 눈만 드러낸 채 낙타를 타고 질주하는 투아레그 족(族)의 모습이 꽤 이국적이다.

그러나 이후 조각상을 유심히 쳐다볼 일은 거의 없었다. 2009년 미국 뉴욕의 UN 본부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의 '95분 막장 연설'을 졸면서 들어야 했을 때나, 2011년 그의 독재 정권이 시민혁명으로 무너졌단 소식에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먼지만 수북이 쌓여가던 낙타상에 다시 눈길이 간 것은 물론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탓이다. 조롱거리로 전락한 보건복지부의 예방법 안내가 한몫했다. 낙타 접촉 금지! 익히지 않은 낙타 고기 섭취 금지!

'듣보잡' 전염병, 메르스가 한반도에 상륙한 지 한 달이 됐다. 초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지역민들조차 대구'경북 확진자 발생 소식에 혼비백산이다. 며칠 전 N95 마스크를 사러 들렀던 한 약국의 중년 약사는 "평생 팔 마스크를 이번에 다 판 듯하다"는 한마디로 시민들의 불안감을 압축했다.

민심은 재차 언급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악화일로다. 엉성한 대응으로 일관한 정부에 대한 신뢰는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2주 만에 10%포인트 급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보인 일부 확진자들에 대한 여론의 마녀사냥식 분노조차 일견 당연해 보인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심 자체는 이미 '판데믹'(Pandemic'전염병의 대유행) 단계까지 온 듯하다. 판데믹은 세계보건기구(WHO)가 분류하는 전염병 6단계 등급의 마지막 등급이다. 지난해 이맘 때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에볼라(Evola), 2009년 지구촌을 강타했던 '신종 인플루엔자'(H1N1)조차 5등급 '에피데믹'(Epidemic)에서 멈췄다.

참담한 가운데 우리가 얻은 것도 있다. '아직 대한민국은 개선해야 할 게 많은 국가'라는 깨달음이다. '개개인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는 공감이다. 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버드맨'의 부제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Unexpected virt ue of ignorance)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진국과 일류 국민을 만드는가? 적어도 콘크리트처럼 경직된 상명하복'복지부동식 사회 문화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사고방식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온 국민을 슬픔의 바다에 빠트린 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자성의 목소리만 높였던 게 작금의 메르스 사태를 불러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당하기만 한 이번 사태는 잘못된 시스템을 확실히 뜯어고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국민의 의식 개선 노력도 시급하다. 사회지도층은 물론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메르스 망국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릇 차기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눈앞의 아비규환을 다스리는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허둥지둥식 행정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이란 핀잔만 듣기 마련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의 존재 이유다.

'창조 경제' 같은 구호만으로 우리 경제가 나아지지 않듯 정부의 후속 조치 역시 안일해서는 곤란하다. '메르스보다도 정부의 무능이 더 무섭다'는 자조가 언젠가 닥칠 다음 위기에서도 반복된다면 국가로서의 수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사족을 달자면, 근거 없는 희망론과 책임감 없는 방관자적 자세 또한 국민을 짜증 나게 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낙관주의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수동적 기대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가 지난해 6월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전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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