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민낯 뒤의 가면

창작가의 상상력은 늘 놀랍다. 쓰거나 만들 때는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상상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어떤 상상은 당연한 현실이 됐고, 또 어떤 것은 곧 다가올 미래가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것들이 많다. 15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던 비행기 기계 스케치나, 조르즈 엘리에스가 1902년 만든 영화 '달나라 여행',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쓴 소설 '1984' 등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1980년대 초 '크레디트 워'(Credit War)라는 만화가 있었다. 지금은 타계한 박봉성 작품이다. 칩 형태의 신용카드 한 장에 모든 개인 정보를 담아 강제로 몸속에 삽입하고, 이것을 읽는 기계를 모든 곳에 설치해 국가가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미래 사회가 무대였다. 아직 이런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오웰의 '1984'의 주제가 그랬고, 비슷한 소재로 몇 편의 영화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곧 현실이 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의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끝장나지 않은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에 실린 시가 몇 편 떠올랐다. 그는 이동(移動)이라는 시에서 '53번, 닭의 내장 속으로/54번, 텍스 속으로/55번, 창(槍)끝으로 당장 떠나라…'라고 썼다.

시인의 의도는 무시하고, 드러난 것으로만 비교한다면 '29번 환자, 경주 동국대병원으로. 154번 환자, 경북대병원으로'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번호의 강제성은 교도소에서 이름 대신 수인(囚人) 번호를 부르거나, 군의 유격이나 공수훈련 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번 올빼미'라고 부르는 몰인격적인 번호와 일맥상통한다.

같은 시집에 실린 '그해 가을'의 마지막 구절이다. 일부 욕설을 ×××로 표현하면 '아버지, 아버지…×××,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라고 썼다. 이 구절은 이번 메르스 때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방위산업비리 등 나라를 뒤흔든 온갖 사건 때마다 입속에 맴돌던 것이기도 하다.

과거 대형참사와 온갖 구조적 비리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났다고 썼다. 부정적인 어감이 강하지만, 그래도 다시는 이런 일이 나지 않도록 확실한 대책을 세우고, 최소한 후속 수습이라도 빨리, 제대로 할 수 있게 바로잡으면 된다는 긍정도 내포한 낱말이다. 그리고 정부가 관련자를 처벌하고, 강력한 대책을 발표할 때마다 국민은 우리의 벌거벗은 민낯을 가리는 화장을 예쁘게 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민낯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시구처럼 늘 가면이었다. 하나가 벗겨질 때마다 구조적인 부정부패와 비리라는 또 다른 가면이 들어앉아 있었다. 앞 시구의 '아버지' 자리에 대통령이나 정부, 국회 등을 써넣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현재의 우리나라다.

국가적 참사는 고통스럽다. 인명 피해는 물론 수습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고 사회 혼란에 따른 국론 분열 등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서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진행 중인 일제 침탈로 한국전쟁, 군부독재, IMF사태와 같은 참사의 고통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참사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때마다 나온 대책과 매뉴얼은 낮잠을 잤다. 사태가 좀 잠잠해질만 하면 정부와 청와대는 딴 짓을 하고, 국회는 편을 갈라 누가 더 힘이 센가 쌈박질만 했다. 늘 피멍이 들고 상처투성이로 고통받는 것은 국민이고, 목숨을 잃는 것도 국민이다.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초화장부터 차근차근하면 더는 참사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키울 수 있어서다. 그러나 우리는 참사의 교훈은 잊고, 드러난 민낯을 대충 가리는 것에 더 골몰했다. 국민은 무섭다. 이런 고통을 치르고도 정말 민낯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메르스 참사가 채 잠잠해지기도 전에 힘겨루기를 채비 중인 대통령도, 정부도, 여야도 모두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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