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故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 회고록…15세에 건설현장 뛰어들어 자수성가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오전 9시면 화성산업 본사로 출근했다. 출근길 만난 직원들에게 먼저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오전 9시면 화성산업 본사로 출근했다. 출근길 만난 직원들에게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던 이 명예회장은 "기업의 근본은 사람이다. 조직의 위'아래가 막혀서는 안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윗사람이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매일신문 DB

매일신문은 2005년 10~12월 당시 89세이던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의 회고록을 17회 연재했다. 이 명예회장은 첫 글에서 "내 삶의 대부분은 이 고장과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역동적인 순간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우민한 글이 비록 보잘것없는 경험에 불과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은 물론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다음은 당시 연재했던 회고록 '나의 꿈 나의 삶: 내 고장 내 나라에 감사하며'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

천수답(天水沓) 농업이란 게 그렇듯 투기적인 성격이 짙었다. 앞날이 어찌 될지 불투명할 때 당시 경주~감포 간 도로공사를 하청받아 공사하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었다. 건설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고, 내 나이 15세가 되던 해였다.

건설현장이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길이 닦여지고, 다리가 세워졌으며, 건물이 들어섰다.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다.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떠밀리다시피 건설현장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할 줄 어찌 알았으랴? 만일 그때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경주시 천북면 어느 산골에서 촌부(村夫)의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만주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한 달에 20여 일 넘게 현장에서 먹고 자고 했다. 낯설고도 먼 이국 땅, 특히 만주의 척박한 겨울 날씨는 뼛속까지 얼게 했다.

◆가슴에 맺힌 울릉도 방파제 공사

화성산업이 창업한 지 꼭 1년이 되던 1959년 9월, 엄청난 시련과 위기가 찾아왔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가장 큰 태풍이었던 사라호가 덮친 것이다. 공사가 80%가량 진행된 불국사~석굴암 도로는 유실됐고, 울릉도 현장의 선박과 장비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재난에 넋을 잃었다. 자본금이 1천30만원이었던 회사의 피해는 자본금의 10배가 넘는 1억5천여만원에 이르러 파산지경에 다다랐다. 설상가상 내무부(건설국)가 우리의 저동 방파제 공사를 당시 전국 1위의 대기업에 넘기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목이 메인다.

사라호 태풍으로 다른 회사에 넘겼던 저동항 방파제공사는 훗날 1986년 태풍 애미호가 강타하면서 유실된 것을 우리가 완벽하게 복구공사를 했는데, 당시의 방파제 공사로는 최대인 60t TTP(파도의 파력을 분산시키는 콘크리트 구조물)를 제작, 시공했다. 타의에 의해 우리가 완성하지 못한 채 다른 회사로 넘겼던 그 공사의 복구를 보란 듯이 잘해내어 정부 산업포장까지 받았는데, 그렇게 해서 30년 전의 회한을 풀 수 있었다. 울릉도 서면 남서리에 가면 화성공원이 있다. 39년간 대역사 끝에 울릉도민의 숙원사업이었던 울릉일주도로를 화성이 완공한 것을 기념해 만든 공원이다.

◆이 땅에 태어나 받은 게 많은 사람

화성이 본격적으로 주택사업을 정비해 건립한 첫 작품이 지산동 녹원맨션이다. 이것을 수도권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는데 오늘날까지 많은 공사를 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서울지역 진출 초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이 속속 터졌다. 자재난과 인력난에 부딪힌 것이다. 경기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투기꾼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주택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거리는 품질에 영향이 없을까 하는 우려였다. 어떤 경우에서도 품질만큼은 훼손시킬 수 없어 아무리 자재가 부족하고 비싸더라도 자재검수만큼은 철두철미하게 하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지금 사랑받고 있는 '화성파크드림'이 지켜왔고, 지켜갈 가장 큰 가치인 것이다.

이 명예회장은 회고록 첫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연한 계기로 건설에 몸을 던졌고 그것이 필생의 업(業)이 되었는데, 그로써 내 고장 내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기를 소망한다. 세상 일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다고 다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화성산업의 성장은 내 노력과 능력에 비해 과분한 보상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받은 게 많은 사람인지라 이제 천수(天壽)를 다할 때까지 내 소임은 이 땅에 뿌리며 사는 것이리라….'

김수용 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