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의 노래를 부른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때/ 일어서서 오만했던 자신을 돌아본다//…/ 다시는 차오를 수 없는 빈 몸의 흐느낌/ 그것이 바람의 노래다//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람의 노래를 부른다.' 지난해 '이상화 시인상'을 수상한 박종해 시인의 '빈 병'이라는 시(詩) 작품이다. 인생의 연륜이 쌓인 시인이 빈 병에서 발견한 시적 자아가 사뭇 의미심장하다. 시쳇말로 잘나가던 시절에야 어떻게 알았을까. 빈 몸이 되고서야 부를 무상(無常)한 노래를….
대구 출신 방송인 김제동이 '술과 빈 병'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우선 술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술은 어디에나 있고, 낮은 곳을 향하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끔은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반전은 빈 병을 통한 부활이다. 동전 몇 푼에 팔려서 고물상이나 슈퍼를 거쳐 공장으로 향하는 빈 병으로 인해 술은 부활하고 세상에 재림한다는 얘기다. 그것은 곧 빈 병의 부활이기도 하다. 김제동은 그래서 술을 주(酒)님이라 부르며 관중의 폭소를 자아낸다.
충남 공주에 있는 국내 최초의 빈 병 재활용 홍보전시관은 빈 병에 대한 생태적'환경적인 접근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을 이끈다. 전시관의 이름도 특별하다. '생명 담은 빈 병 이야기'이다. 이곳에 가면 빈 병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보며 자원 절약과 환경사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빈 병이라는 단어는 술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병이란 술을 머금고 서 있을 때는 그 존재의 가치를 모른다. 시인의 노래처럼 빈 병으로 쓰러지고 나서야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 빈 병들이 호시절을 만났다. 평소에 흔하던 빈 병들이 때아닌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주류회사 외 병 생산업체가 균형을 맞춰온 병 수급에 차질이 생기며 자칫 술값 인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정부가 빈 병 회수율 제고를 위해 내년부터 빈 병 값을 두 배 이상 올리겠다는 예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빈 병 대란'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판국이니, 빈 병 사재기가 벌어지고 수거업체마다 가격이 오를 때를 기다리는 빈 병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애써 눈길을 주지 않던 하찮은 빈 병이 고귀한 몸이 되어 부활을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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