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월호를 잊지 못하는 대구시민들이 많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며 진도 앞바다에 뛰어들어 수중구조'수색작업에 나섰던 특전사 출신 다이버들, 자발적으로 참사 현장을 찾아 자원봉사에 소매를 걷어붙인 시민들이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그들을 만나봤다.
◆수중구조 특전동지회원
"수온도 차가웠지만, 무엇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요. 수백 명이 물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배를 찾았지만 여의치가 않더군요."
대한민국특전동지회 재난구조협회중앙회 홍재호(54) 부회장은 꼭 2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물속이 뿌옇게 흐려서 손을 뻗으면 손끝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조류가 거세지면서 바닥의 뻘이 일어나 시야가 더욱 흐려진 데다, 파도까지 높아지면서 구조대원이 위험에 빠질 상황"이었다고 했다.
홍 부회장 등 이 협회 대구시지부 회원 38명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이틀 만인 18일 오전 7시쯤 진도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진도까지 360㎞의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갔다. "사고 직후 회원들에게 SNS를 통해 수중 수색작업 참여 여부를 물었더니 많은 회원이 흔쾌히 가겠다고 하더군요. 일부 회원 중에는 하던 일까지 중단한 채 달려온 사람도 있었어요." 홍 부회장도 당시 선친의 49재를 치르지 못하고 진도행을 택했다.
진도에 도착한 이들은 안전바 등 수중구조에 필요한 안전시설물 설치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 홍 부회장과 함께 수색작업에 나섰던 배은수(53) 사무국장은 "오후 2시쯤 안전시설물 설치가 끝났다. 구조자의 안전상황이 완료되지 않으면 구조에 나설 수 없다는 구조원칙에 따라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 몇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수면 30m까지 내려가는 수색작업은 20분 간격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산소통은 30분가량 사용할 수 있지만 물에 들어가는 시간과 나오는 시간을 빼면 작업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다 물살마저 센 진도 앞바다에서의 구조작업은 스킨스쿠버 23년 경력의 홍 부회장이나 배 국장에게도 녹록지 않았다.
이날 4명이 1개 조로 사투에 가까운 수색을 벌여 2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구명조끼를 입은 여학생들이었다. "배에서 뛰어내린 학생들로 보였어요. 물 밖으로 나와 있더군요.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미처 피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시신을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홍 부회장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우리 어린 학생들이 불귀의 객이 된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고 죄송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였던 지난해 4월 16일, 팽목항에 다녀왔다.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 있을 실종자들의 억울한 영혼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홍 부회장과 배 국장은 "대구지하철 참사도, 세월호 참사도 매번 그때뿐이다. 매번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안전을 외친다"면서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안전예방 시스템을 하루빨리 갖춰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입을 모았다.
◆자원봉사자 박지수 씨
세월호가 차디찬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2014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박지수(31) 씨는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한 채 짐을 꾸렸다. 사고 현장을 찾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뉴스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답답하고 화가 났어요. 누구 하나 정확한 이유나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말보다 행동으로 옮겨야겠구나 생각했지요."
진도 팽목항까지 무작정 승용차를 몰았다고 했다. 새벽 1시에 출발한 박 씨는 초행길인 탓에 5시간이 걸려, 6시쯤 팽목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사고수습본부를 찾아 자원봉사하러 왔다고 했어요. 뭐든지 할 테니 일을 시켜달라고 했지요."
처음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도체육관에 구호물자 등을 옮기는 일과 쓰레기 수거 등 청소일을 도맡아 했다. 거기서 박 씨는 대구에서 온 4명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이들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고 세월호 참사 현장에 달려온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전국에서 실종자 가족을 돕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온 자원봉사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처음엔 3일을 머물렀고, 그 뒤에 두 번 더 찾아갔어요. 조금이라도 슬픔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현장에선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절대 실종자 가족분들과 얘기를 하거나 접촉을 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약속도 있었지요. 묵묵히 뒤에서 가족분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일만 했습니다."
하루는 점심식사 배식을 거들 때, 박 씨의 눈에 한 가족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군에서 갓 전역한 듯한 아들의 모습이었어요. 3명 모두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계셨어요. 그 모습이 얼마나 짠하게 다가오는지…." 박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신이 팽목항으로 한 구, 한 구 들어오면서 일대는 울음바다가 됐어요. 우리는 멀리서 눈물을 흘려야 했지요. 그때는 누구의 잘못이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슬퍼해야 하는지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라면서 고개를 떨궜다.
체육관 한 편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승용차 안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생업 때문에 한 달쯤 뒤 대구로 돌아온 박 씨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진도로 보내는 일을 했다. 회사에 휴가를 낸 회사원, 어린이집 일을 접고 따라나선 선생님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진도봉사센터에서 더 이상 자원봉사자를 보내지 말라는 연락을 받을 때까지 100여 명을 보냈다"고 했다.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광경들이 생생합니다. 다시는 이런 슬픈 일들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박 씨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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