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는 어디에도 존재한다. 개인과 가정, 기업, 국가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물처럼 언제든 빈틈을 파고든다. 평소 리스크를 계량화해 적절히 분산한다면 리스크는 하나의 기회다. 리스크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역량과 성숙도가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리스크는 피할 수 없지만 관리할 수 있다'는 말에서 그 속성을 알 수 있다.
3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조선 빅3 사태'는 현재 우리 경제의 최대 리스크다. 조선'해운업의 부실은 기업의 부실을 넘어 정부와 금융감독기관, 국책은행의 위기와 뿌리가 같다. 리스크의 관리 주체인 정부, 공적 기관, 기업이 시장 판단이 아니라 무책임한 정치적인 선택에 빠진 결과다. 망할 기업은 망하게 두는 시장의 논리 대신 자본의 은밀한 공모가 결국 거품처럼 터진 것이다.
부실의 진원지인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16년간 13조원의 공적 자금을 빨아들였다. 경영진의 할리우드 액션에 최대주주인 산업은행도 4조2천억원의 대규모 세금을 넣었다. 하지만 분식회계 의혹과 수주 절벽에 공적 자금은 결국 눈먼 돈이 됐다. 제대로 된 경영 평가나 사회적 합의 없이 세금을 퍼붓다 탈이 난 것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대우조선 등 여러 조선'해운사에 빌려준 돈을 합하면 무려 20조원에 이른다. 부실에 발목이 잡히자 또다시 세금이라는 돈주머니에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다.
MB 정부 때 일이다. 산업은행 수장인 '총재' 명칭을 놓고 이명박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08년 3월 금융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MB는 "아직도 총재로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총재 호칭은 한국산업은행법에 정해진 것이다. 이를 바꾸지 않고는 총재 대신 다른 직함으로 부르기도 어렵다. 그러나 MB는 "법이 그렇다 해도 제대로 된 은행장이라면 규정을 바꾸지 않아도 '은행장'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며 "우리 관료사회의 뿌리깊은 권위의식"을 꼬집었다.
그해 6월 민간 출신으로 첫 산은 수장이 된 민유성 총재는 명함에 총재 대신 '산업은행장'을 박아 다닐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는 장사꾼을 자처했다. 민영화와 투자은행(IB)으로의 변신에 의욕을 냈다. 산은금융지주 체제 출범과 본부장 직제 등 몇몇 변화가 있었지만 그도 산은의 묵은 체질과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후임 회장들도 정부와 감독기관인 금융위원회의 눈치나 살피고 국책은행으로서의 정책 기능이 무뎌지면서 고비용 저효율 은행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온실에서 62년을 버텨온 국책은행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조선'해운업의 부실 구멍도 세금으로 메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세금이 또 구원등판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세금을 '모든 리스크 완화 장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국가가 세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사회적'공적 리스크를 현저히 낮출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금에도 한계는 분명하다. 다 죽어가는 환자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 편작의 신술(神術)도 아니고 미다스의 손도 아니다. 국책은행을 통해 민간에 공급한 정책 자금이 국민 생활에 충격을 주고 리스크를 키웠다면 정책 오류와 국책은행의 잘못된 경영을 먼저 짚어보는 게 순서다.
여론이 나쁘자 정부와 금융위원회는 공적 자금 투입에 앞서 국책은행의 경영 쇄신과 자구 계획을 먼저 살펴보겠다고 했다.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 분담 차원에서 임금 반납이나 재취업 제한 등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공공기관들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꺼내 드는 '꼬리 자르기' 카드다.
지난 2월 옷을 벗은 홍기택 산은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느슨해진 악기 줄을 다시 고쳐 맨다'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을 화두로 내걸었다. 지금 국책은행이 해야 할 일은 이런 혁신의 각오다. 국민이 이번에도 정책이라는 사탕발림과 얕은수에 넘어갈 것이라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 리스크라면 지겨울 정도로 겪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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