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9)황매산

철쭉 꽃 시든 철쭉 명소…아쉬움 털어내니 山이 보였다

황매산 황매평전 밑에서
황매산 황매평전 밑에서 '한국 명산 16좌' 엄홍길 대장과 등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에 철쭉꽃이 대부분 져버려 기대했던 '산상화원'은 무산되었다.
등산객들이 황매산 등정에 앞서 엄 대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등산객들이 황매산 등정에 앞서 엄 대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왔다는 무더위는 많은 것을 흩어 놓았다. 무엇보다 더위는 봄꽃에도 치명적이다. 기온이 올라가면 나무는 잎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꽃을 떨구기 때문이다. '십일홍'(十日紅) 시효를 믿고 느긋하게 꽃낭을 밀어 올리던 철쭉들은 무더위 앞에서 오일홍(五日紅)으로 급히 꽃술을 접어야 했다.

무더위가 흩어 놓은 건 또 있다.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행사다. 20일 뙤약볕 황매산 정상에서 등산객들을 맞은 건 진홍의 꽃물결이 아닌 밋밋한 황매평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상황은 곧 감동으로 바뀌었다. 개화 시기가 빗나가 꽃 산행이 엉망이 되었지만 참가자들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주최 측을 비난하며 난리가 날 법도 한데 등산객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과 자연의 불찰을 헤아리고 있었다. 등산객들의 베풂과 아량이 빛났던 합천 황매산으로 올라보자.

◆바래봉'소백산과 함께 철쭉 3대 명산=아웃도어 전문업체 밀레 주최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황매산 행사에는 오늘도 전국에서 40여 대의 버스가 몰려들었다. 초여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가장 많은(1천400명) 등산객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하창환 합천 군수가 일찍부터 행사장에 나와 엄 대장과 전국의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 대장은 인사말에서 "아쉽게 철쭉 개화 타이밍을 놓쳤지만 내년에도 꽃은 피어나니 후일을 기약하자"며 등산객들과 함께 섭섭함을 달랬다.

매장별로 기념 촬영을 마친 등산객들은 덕만주차장을 출발해 철쭉 평원을 향해 나갔다. 황매산은 소백산, 지리산 바래봉과 함께 철쭉 3대 명산의 반열에 올라 있고 그 규모 면에서 전국 최대 면적을 자랑한다. 특히 개화 피크 때 정상부에 펼쳐진 철쭉 물결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산상화원을 연출한다. 얼마 전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 봐야 할 곳 50선'에도 이름을 올려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신라'백제 패권 다툰 황매산 일대=덕만주차장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급경사의 연속이다. 다행히 중턱까지 계곡이 잘 발달돼 더위를 씻을 수 있다. 황매평원으로 가는 길, 왼쪽으로는 영남의 소금강이라는 모산재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상봉, 중봉, 장군봉(할미산성)이 이어진다.

보통 합천 하면 역사적으로 가야산, 해인사, 최치원 은신 스토리를 떠올리는데 여기에 '대야성(大耶城)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백제왕 즉위 초기 '해동의 증자'로 불리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의자왕은 집권 후 동진(東進)정책을 펼쳐 신라를 괴롭혔다. 7세기 초반 왕은 친히 군사를 몰고 와 40여 개 성을 빼앗은 적도 있었다. 642년 백제는 다시 한 번 신라를 침공해 합천의 대야성 일대에서 접전을 치른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신라 성주 김품석과 부인 고타소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고타소는 후에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동생이었다. 김춘추는 '벽에 머리를 짓찧을 정도'로 슬픔에 젖었다고 한다.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 김춘추는 외교 행보 끝에 당태종을 설득하고 나당연합군을 구축해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대야성 전투 현장 중 하나가 황매산 일대 할미산성이었으니 7세기 중반 동북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단초가 이곳 합천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정상 오르면 지리'덕유산 실루엣 한눈에=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령 황매산은 고려 말 대선사인 무학 대사가 수도를 한 곳으로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 황매산 정상에서 북쪽 능선을 넘으면 산청군이고, 모산재나 감암산 쪽으로 빠지면 합천군 영역이다.

황매산은 합천호와 곧잘 연결된다. 대병면 쪽에서 보면 합천호에 비친 산의 모습이 호수에 떠 있는 매화와 같다고 해서 '수중매'(水中梅)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합천군은 황매산 일대에 휴양림, 오토캠핑장 등 위락시설을 설치해 휴양 명소로서의 외형을 갖추었다.

원정대가 오토캠핑장을 지나 평전 밑으로 들어서자 광활한 황매평원이 펼쳐졌다. 기대했던 '빨간 융단'은 없었지만 신록으로 펼쳐진 평원도 시원한 풍경을 펼쳐 내고 있었다.

수성구 시지에서 왔다는 김미희(47) 씨는 "꽃 카펫 대신 초록 융단도 그런대로 괜찮다"며 "오늘 철쭉 산행 불발의 아쉬움은 소백산 철쭉제 때 달래면 된다"며 웃어넘겼다.

꽃 산행 무산의 아쉬움은 정상에서도 달랠 수 있다. 철쭉제단 쪽 황매봉(1,108m)에 오르면 합천호와 지리산 천왕봉과 덕유산, 가야산 능선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특히 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합천호 물결은 등산객들의 여독을 씻어 내기에 충분하다.

◆불평 없이 따라준 등산객들에게 감사=하산 길에 그늘에서 땀을 닦던 엄 대장과 잠시 마주쳤다. 매일신문 탑리더스 아카데미 특강 때 대성황을 이룬 데 대한 축하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아마 영화 '히말라야' 주인공들이 지역 출신이어서 감동이 더 컸을 것"이라고 말하고 "특히 백준호(대건고), 장민(계성고)의 선후배들이 강의 중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며 독자들의 관심에 감사를 표했다.

또 네팔에서 지진 피해 구호, 병원 건립 일정 때문에 귀국이 지연, 개화 시기를 놓쳐 원정대에게 미안하다는 뜻도 전했다. 그럼에도 불평 없이 따라 준 등산객들에게 무척 감사하다며 인사를 대신했다.

꽃의 시효는 '십일홍'이지만 등산객의 우정은 '백년홍'(百年紅). 황매산 산행에서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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