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망명해 새로운 터전을 일궜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숨긴 것이 들통나 다시 빈손으로 조선에 들어와야 했던 이경희 선생 일가의 생활고는 암울했다. 더욱이 이경희 선생이 의열단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그 참담함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 당시 사연이 동아일보 1923년 7월 22일 자에 실렸다. 제목은 '가족은 철창 밑에 가족들은 주럼에 울고 있는 의열단원의 가정. 차마 못 볼 일 이경희 가족'이다.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주: 오래된 신문지면이어서 일부 글자는 알아볼 수 없어 '○○'으로 표시했음)
◆궁핍한 살림에 옥바라지한 부인 조 씨
이경희 선생이 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던 날 상황에 대해 이단원 여사는 어머니 조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갑자기 일본 형사가 집으로 들이닥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볼일이 있어 집으로 들어오는 동네 사람들을 모조리 감금했어. 동네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잡혀 있었는데,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 동네 사람들을 (일본 경찰이) 풀어주었어. 막연히 무슨 큰 난리가 벌어졌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 그냥 두려움에 떨기만 했지."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신문 호외가 뿌려지고 난리가 났어. 의열단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야. 당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건 연루자는 모두 사형당한다고 생각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앞이 캄캄했지…."
안 그래도 살림살이가 궁핍했던 이경희 선생 가족들은 생계를 유지하랴, 옥바라지를 하랴 그야말로 '거지 중의 상거지' 신세가 됐다. 그러나 부인 조 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경희 선생의 목숨만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려면 변호사 비용이 필요했다. 끼니도 잇기 힘든데, 변호사 비용이라니….
마침내 조 씨는 친정에 손을 벌리기로 결심했다. 경성에서 함경남도 단천까지 어린 두 아이(큰딸, 큰아들)를 데리고 가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등에 업힌 아들만 데리고 가고, 큰딸 인원(당시 8세)은 세들어 사는 주인집에 맡기기로 했다.
"(곡식 주머니와 함께 큰딸을 맡기면서) 제발 우리 딸아이 굶어 죽지만 않게 돌봐주오."
부인 조 씨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눈물을 삼키며 함경도 단천 이모집으로 먼 길을 떠났다.
부인 조 씨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한 달 이상이 지나서였다. 친정에서 상당한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경성에 홀로 남겨둔 큰딸 인원은 엄마와 가족들이 자신을 버렸을지 모른다는 공포심과 외로움에 극심한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와 동생이 외가로 떠난 뒤, 되돌아올 때까지 집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문구멍으로 밖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이웃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이경희 선생의 부인 조 씨가 다시 큰딸과 재회했을 때, 큰딸 인원의 머리에는 깨바가지를 쏟아놓은 듯 이가 들끓었고,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언니는 그 이후로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렸어. 너무 불쌍하지."
이단원 여사의 증언이다.
◆광복 후에도 이어진 가난의 굴레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부인 조 씨와 그 가족들의 비참한 삶은 그 이후로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이 뭔지도 모르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어. (독립운동을 하느라)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대신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을 하셨어. 그 고생은 광복 이후 아버지가 경북부지사와 대구부윤(현 대구시장)을 겸임하는 시기에도 면할 길이 없었지. 오죽했으면 (유언 삼아) 내가 죽거든 인천 이씨 선산에 묻지 말아 달라고 하셨을까. 아버지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좋아 독립운동을 하셨으니 무슨 고생을 했든 자신의 책임이지만, 대체 불쌍한 우리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워…."
이단원 여사는 독립운동가 아버지가 자랑스럽기보다는 어머니의 삶이 더욱 안타깝다고 했다.
또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이름 모를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외삼촌 조훈(독립운동가)의 며느리 설 씨의 말에 따르면, 서간도에 있었을 때 어떤 독립군이 상해임시정부의 밀신을 품고 일본 헌병에게 쫓기다 하수구에 숨었는데, 이듬해 봄 하수구가 녹자 시신으로 발견된 경우가 있었다고 해. 그분의 유복자가 지금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는데, 지금의 우리나라 보훈시스템으로 이 유복자가 무슨 수로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어. 이것이 현실이야."
이단원 여사는 "시인 발레리가 '지구는 이름없는 자에 의해 돌아간다'고 했듯이, 국립묘지에 가면 무명전몰장병이 수도 없이 잠들어 있어.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과 무명전몰장병, 그리고 그 가족들의 희생과 넋 덕분에 대한민국이 길이 존속하고 빛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의열단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경희 선생은 1924년 5월 26일 출옥했다.
◇의열단 사건이란?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단장 김원봉)이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핵심 건물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조선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22년 하반기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경성전기회사, 주요 간선철도 등의 기관 및 시설물과 총독, 정무총감, 경무국장 등 총독부 주요 요인을 겨냥한 대규모 암살 폭파 거사를 추진했다.
이 계획의 중심에 경북 안동 출신의 김시현이 있었고, 현직 경찰 간부(경부) 출신의 황옥이 개입되어 있어 다른 의열투쟁과 다른 양상을 띤다.(일명 황옥사건으로도 불린다)
이경희 선생은 1923년 3월 15일 황옥 경부의 집에서 '조선혁명선언서'(신채호 작성) 1책,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문서 100장을 전달받았다. 이경희 선생은 부탁받은 대로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란 제목의 전단을 각 도지사와 경찰부로 우송하고, 나머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에 뿌렸다. 일종의 대외홍보담당 역할을 맡은 셈이다.
1923년 3월 오종섭의 밀고로 시작된 검거 열풍에서 일제 경찰은 관련자 25명 중 18명을 체포하고 폭탄과 총기류를 모두 압수했다. 폭탄은 살인용과 방화용, 파괴용 3종류로 모두 36개였는데, 종전의 것보다 성능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폭탄의 국내 반입은 김원봉과 김시현, 황옥이 주도했다.
이 사건은 경기도경찰부, 평안북도경찰부, 신의주경찰서 등 3곳 경찰기관의 수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졌다. 1923년 3월 14일 평북경찰서 및 신의주경찰서는 안동경찰서와 협력해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 등 6명의 관계자를 검거했다. 다음날 경기도경찰부가 관련자 12명을 잇따라 검거했다. 사건 관련자들은 1923년 8월 22일 경성지방법원의 결심공판에서 12명에게 유죄가 인정돼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이때 이경희 선생은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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