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달성군이 확 바뀐다] <2>대견사 금강계단, 적멸보궁으로

진신사리 모신 비슬산 정상, 세계 불교계 성지되다

대견사는 경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짓고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과 사경(寫經) 등의 복장식을 가졌다. 사진은 왼쪽부터 류병선 대구불교총연합회 신도회장, 성문 스님(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김문오 달성군수,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불교석조미술전문가). 대견사 제공
대견사는 경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짓고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과 사경(寫經) 등의 복장식을 가졌다. 사진은 왼쪽부터 류병선 대구불교총연합회 신도회장, 성문 스님(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김문오 달성군수,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불교석조미술전문가). 대견사 제공
대견사 중창 현장을 방문한 스리랑카 딜란 장관 일행
대견사 중창 현장을 방문한 스리랑카 딜란 장관 일행
대견사 금강계단에 안치된 부처님 진신사리
대견사 금강계단에 안치된 부처님 진신사리

조선 성종 9년(1478)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대 시인, 문사들의 시문 가운데 우수한 것을 모아 편찬한 동문선(東文選). 이 책에 고려말 조선초 문신인 이첨(李詹)의 '보당암을 중창하고 법화삼매 법회를 여는 소(疏)'가 담겨 있다.

당시 이첨은 비슬산에 여러 가람이 허물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 자리에 다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여러 스님들과 힘을 합해 절을 중창하고 7권의 법화경을 예참(禮懺), 낙성식(落成式)을 갖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저축하였던 조그마한 재산을 정성껏 보시하고 희사하고자 합니다. 이 비슬산 위에 보당암(대견사)이 있는데 터만 남아 있고 그 밖의 것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바람과 비에 쓸려서 난간이 꺾어지고 기왓장이 헐린 지 오래이며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으면서 수많은 날과 달이 바뀌었습니다.

스님들과 함께 수고하여 마침내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둥과 들보는 옛날과 같이 웅장하고, 단청은 새로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이 공사를 마치게 됨에 소원을 풀고자 7편의 법식(법화경)을 장만해 낙성을 행하며, 일대의 존숭받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모시고 참선하는 예를 주관하게 됐습니다."

◆적멸보궁 대견사

지난달 24일 비슬산 대견사에서 지금으로부터 600~700여 년 전에 이첨이 대견사를 중창하고 낙성식을 갖는 모습과 흡사한 의식이 치러져 불교계의 관심을 모았다.

이날 대한불교조계종 대견사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짓고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인 성문 스님, 김문오 달성군수, 각운 대견사 주지, 류병선 대구불교총연합회 신도회장, 불교 신도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과 사경(寫經) 등의 복장식을 가졌다.

이날부터 대견사는 적멸보궁이 됐다. 법당 내에 불상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대신 일반 사찰의 법당(대웅전) 격인 대견보궁 뒤편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이제 비슬산 대견사도 적멸보궁의 핵심인 금강계단 보궁을 갖춤으로써 천년고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게 됐다.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금강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戒)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없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으로 나누고 삼학 가운데는 계율이 으뜸이다. 따라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한다는 뜻에서 금강계단이다.

◆금강계단의 유래는?

금강계단은 인도에서부터 유래됐다. 중국 당나라 때의 학승인 의정(義淨'635~713)이 구법승 61명의 전기를 찬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인도 불교의 중심지인 나란타사(那蘭陀寺)에 금강계단이 있다고 했다. 그 형태와 크기는 중앙에는 작은 탑이 있고 안에는 사리를 봉안하였음이 묘사돼 있다.

중국은 도선의 계단도경(戒壇圖經)에 의해 정업사에 이 계단을 건립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를 얻어 귀국한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최초로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인 계묘년(癸卯年'643)에 자장율사가 당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두골과 치아 등 불사리 100여 개를 3등분해 각각 부처님이 입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에 싸서 하나는 황룡사탑에 또 하나는 태화사탑에, 나머지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통도사의 계단은 처음 세워진 이래 거듭된 중수(重修)로 당시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지금의 계단은 일부 고려 때의 석물과 조선시대 후기의 석물이 섞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형의 2중 석단의 중앙에 2매의 연화대석(蓮花臺石)을 중첩시키고 종형의 사리부도를 올려놓는 옛 방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견사의 금강계단도 상하 2단의 기단부와 상부의 사리부도(석종형) 등으로 구성된 점은 대동소이하다. 대견사의 적멸보궁에 들어선 사람이 후면 밖의 금강계단을 바라보는 시야 각도를 금강계단의 최고 높이와 맞췄다.

특히 법당(대견보궁)과 금강계단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법당의 기초 부분에서 1m 87㎝ 정도 성토를 하고 기단을 깔았다. 그 위에 1m 15㎝ 높이의 상하 2단 기단부를 조성한 후 상층 1m 48㎝ 규모로 범종형인 사리부도 석개(石蓋)를 안치했다.

같은 비슬산 자락의 용연사 금강계단(보물 제539호)은 높이 2m. 돌로 만든 계단으로, 돌난간으로 테두리를 두른 탑구(塔區) 안에 있다. 앞에는 배례석(拜禮石)과 함께 석등이 서 있고, 다시 그 앞쪽에 법당이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다

용연사 금강계단에 봉안된 부처님 사리는 자장법사가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돼 사리를 도난당했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또 다른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했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했으나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 금강계단 보궁에 봉안하게 됐다.

용연사 금강계단 보궁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 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하고 비슬산에서도 용연사에 이어 대견사 역시 적멸보궁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전해져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비슬산 대견사에 봉안케 된 것은 부처님의 자비가 비슬산에서 비롯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대견사 금강계단 보궁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는 스리랑카에서 이운돼 왔다. 대견사의 교구본사인 동화사는 대견사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난 2013년 6월 동화사를 방문한 딜란 페리라 스리랑카 해외고용복지부장관에게 진신사리 기증을 요청했다.

이 당시 대견사 중창 현장을 둘러본 딜란 장관은 불교 성지로서의 입지적 조건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동화사 측은 4개월 후인 그해 10월 딜란 장관의 초청으로 스리랑카를 방문해 진신사리 기증과 관련해 긴밀한 논의 끝에 결국 스리랑카 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동화사가 스리랑카 쿠루쿠데 사원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기증받기로 한 것이다.

◆국제적 주목받는 대견사

딜란 장관은 진신사리 기증과 관련해 김문오 달성군수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딜란 장관의 편지는 "동화사 방문단 일행이 대견사 터를 방문했을 때 비슬산 정상의 경이로운 풍치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을 중창하려는 노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며 "동화사 주지 스님과 약속한 대로 스리랑카가 신성한 유물(진신사리) 기증을 가능토록 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라 동화사는 2013년 11월 22일 스리랑카에서 모셔진 진신사리를 이운하고 이를 다시 대견사로 옮겨오면서 '친견대법회'를 대대적으로 열어 불교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진신사리는 기원후 103년부터 스리랑카 도와사원에서 보관해오다 1881년부터 쿠루쿠데 사원에 모셔진 사리 4과 중 하나다.

당시 동화사 주지인 성문 스님은 진신사리 이운법요식을 통해 "진신사리가 대견사에 이운돼 온 것은 비슬산 대견사가 불심을 굳건히 하는 성지로서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스리랑카와 대한민국 사이의 우호협력뿐만 아니라 전 세계 불교인이 함께하는 교류의 장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스리랑카 쿠루쿠데 사원의 지난다나 스님과 스리랑카 불교계 관계자들은 대견사 중창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쿠루쿠데 사원에서 이운돼온 부처님 진신사리가 천년의 역사와 함께 중창되는 대견사에 모셔지는 것에 대해 스리랑카 국민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고 했다.

전체 인구 2천200여만 명의 80%가 불교 신자인 스리랑카에는 부처의 진신치아 사리를 모셔 놓은 곳이 있다.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116㎞ 떨어져 있는 도시 캔디에 소재한 '불치사'(佛齒寺) 혹은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는 스리랑카의 가장 신성한 불교 사원으로, 전 세계의 불교 신도들이 순례하는 곳이다.

분홍빛 벽에 붉은 기와를 올려놓은 전형적인 싱힐라 건축 양식의 사원으로 내부에 부처의 치아를 담은 금빛 사리함이 있다. 탑 모양의 사리함은 루비와 사파이어'다이아몬드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둘레에 7겹의 황금 띠를 둘렀다.

이곳에 모셔진 부처의 치아는 362년 인도 남부 칼링가 왕국에서 보내온 것이다. 당시 칼링가 왕국은 대기근과 전쟁이 그치질 않았는데, 어느 날 국왕의 꿈에 부처가 불치(佛齒)를 스리랑카로 보내면 기근과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 했다.

왕은 신통력이 있는 헤마말라 공주를 시켜 불치를 스리랑카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불치는 아누라다푸라의 담마찻카에 모셔졌으며, 매년 무외산사(無畏山寺)에서 불치제를 올렸다. 불치는 이후 왕위 계승의 상징이 되었으며, 스리랑카인들의 확고한 신앙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11일 동안 페라헤라(불치) 축제가 열린다.

한편 대견사는 오는 15일 대견사 현장에서 전국 불교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인 '금강계단 점안식 및 수계법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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