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노아 방주의 평화

영국 레스터대학의 물리천문학부 대학원생들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 방주에 대해 과학적 연구를 시도하면서 추정한 것은 방주에 들어간 동물이 3만5천 쌍으로 약 7만 마리 정도 된다고 했다. 그중에는 몸무게가 5t이 넘는 아프리카코끼리, 4t 가까이 되는 하마, 2t이 넘는 코뿔소를 비롯해 엄청난 덩치의 큰 동물뿐 아니라 사나운 야생동물들이 함께 있었다. 물론 연약한 토끼, 작은 쥐, 심지어 기어 다니는 곤충들도 같이 들어갔다. 그 많은 동물들이 방주에 함께 있었던 기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무려 375일이다. 곧 1년 하고 열흘 동안 있었다.(창세기 7, 8장에서)

노아 방주를 생각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긴 시간, 이 많은 동물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낸 것이다. 어느 하나도 다른 동물을 해치지도 잡아먹지도 않았다. 같은 종(種)도 아니고 각기 다른 종들이다. 서로 체취도 다르고 행동습관이 달라서 분명 싸울 텐데, 전혀 싸우지 않았다. 방주의 크기, 건조한 기간, 홍수를 견뎌낸 조선 기술 등 어느 것도 이 사실보다 더 진귀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근래 엽사들을 돕는 사냥개들이 근처 가축들을 해쳐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사냥개를 훈련하는 조련사들이 주장하기를 훈련을 마친 사냥개들은 자기를 공격하는 동물 이외는 해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결과를 낳았다. 다른 동물을 보면 강한 것이 약한 것을 공격하는 것은 동물들의 본능이다. 그런데 방주 안에서 어떻게 싸우지 않고 1년 넘게 사이좋게 지냈을까?

이 궁금증에 아무도 답할 수 없다. 단지 추정하기를 노아 방주는 구원의 배인데 비록 미물(微物)들이지만 그들도 구원해주신 신(神)의 은총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구원받은 미물도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노아 방주를 오늘의 교회에 비유한다. 교회는 죄악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의롭다 할 자가 없다. 교회는 순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모인 천사 공동체는 아니다. 오히려 죄 많은 자들이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그리스도의 은총에 귀의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아무도 남을 정죄할 수 없다.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 7:1)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이런 평화의 공동체로 세워나가야 한다. 이뿐 아니라 그런 평화 공동체의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곧 방주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삶의 문화를 확장시켜가야 한다. 이것이 곧 교회의 선교이다. 교회가 이런 방주 문화를 구현해나간다면 이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자기중심성이 갈수록 강해지는 한국 사회에서 나와 다른 종과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하는 영성 운동이 필요하다. 마르틴 부버가 권고한 대로 타인을 당신(You)으로 봐야 하지 그것(It)으로 보면 안 된다. 이웃을 교환 가능한 것 곧 소모품으로 관계하면 인류는 망한다.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짙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군인들이나 군사 문화에 젖어 있는 지도자들에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라고 하면 그들은 군비 확장에 매달린다. 그래서 더 큰 전쟁을 준비하게만 할 뿐이다. 노아 방주는 오늘에도 필요하다. 도망칠 선박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용서받고 구원받은 은총을 경험하는 길만이 자기를 내려놓고 타자를 존중하게 되는 평화의 길이다. 평화는 정치도 아니고 윤리운동도 아니다.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오직 구원하신 신(神)의 은총을 깨달아 겸손히 서로 존중할 때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나라에 평화가 도래(到來)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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