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잘 자요!

밤은, 진솔한 고백과 정직한 반성을 좀 더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당돌한 도전과 무모한 자학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는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가. 사랑의 역사, 반란의 역사, 파멸의 역사,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숱한 역사 말이다. 그런데 대체 밤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 해군관측소에 따르면 황혼(黃昏)은 시민 박명, 항해 박명, 천문 박명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시민 박명'은 일몰 바로 다음에 오는, 그러니까 길을 달리던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밝혀야 하는 시점을 말한다.

'항해 박명'은 시민 박명이 나타나고 30분쯤 뒤에 나타나는 때로, 항해하는 데 필요한 가장 밝은 별을 눈을 들어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어두워진 즈음을 이른다.

마지막으로 '천문 박명'은 일몰 후 한 시간 이상 지날쯤, 아주 흐릿하고 희미한 별들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컴컴해진 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단계가 거꾸로 움직이면 여명(黎明)에 가 닿는다. 눈에선 별이 밀려나고, 도로에선 헤드라이트 빛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이름하여 첫 새벽.

밤은 거기에 있다. 황혼에서 여명 사이. 불그스름한 어둠에서 거무스름한 밝음으로 가는 그 길. 아이의 헌 이를 새 이로 바꿔주기 위해 요정이 날아가고, 배신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한 여인이 옛 애인의 꿈속으로 쳐들어가며, 동화책 속의 착한 귀신이 새로 부임한 사또를 방문하는 바로 그 틈,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밤에 사람은 잔다. 그것이 자연이고 섭리이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군가에게 밤이란, 까다롭고 고집만 센 양떼를 이리저리 몰고 다녀야 하는 고단한 싸움과 다르지 않다. 매애애. 한 마리, 열일곱 마리, 서른아홉 마리, 점점 불어나는 양 떼 말이다. 매애애.

사람은 잠들 수 없을 때에야 밤이 얼마나 긴지 비로소 알게 된다.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지에 대한 어떤 조사에 의하면, 성인의 50%가 단기 불면증을 겪고 있으며, 10%는 급성 불면증에 괴롭힘을 받은 적이 있다. 5% 정도는 아예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낸다. 급성과 만성의 경계에 놓인 애매한 사례까지 합하면, 전 세계적으로 중장년층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지 불면증에 부대낀다는 것이다. 나도 그 가여운 중장년층의 하나다. 그래서 나는 양이 싫다. 흉악한 천사들. 매애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단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병들어 앓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 정말 자야 한다. 그렇게 죽기는 싫으므로. 그래서 기도한다. 당신도 잘 자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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