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어르신 수상(隨想] 그리 사는 것이네

산길에 아는 얼굴이 많아진다. 인사를 걸어오는 옛 직장의 사람도 이내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으니 시간이 벌려놓은 틈새가 서먹하다. 물기 마른 얼굴이다. 문득 초등학교 운동장을 덮었던 만국기가 눈에 펄럭댄다. 참새 떼와도 같았던 나와 또래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갈려져야 교실이 있었지만, 그날은 같이 뜀박질하며 뒹굴었다. 상으로 받은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씩 쥐고는 논둑길을 타고 고샅길로 들어서며 신이 났던 날이었다.

우리끼리의 전쟁이 끝나고 헐벗은 어머니 자궁에서 쏟아지듯 아이들이 나왔다. 캄캄한 밤마다 지을 일은 그것밖엔 없었으니 울분을 토하듯 부지런히도 움직였던 공덕이리라. 그 아이들이 이제 '베이비부머'란 계급으로 두 번째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700만 명의 집단 은퇴다. 지금 일하는 사람 5명 중 1명이다. 산에서 만난 이들 또한 그 또래들이다.

엄마와 승강기를 탄 아이가 귀엽다. 을러보고도 싶지만 어른의 손은 함부로 내밀지 못한다. 아이가 귀하게 된 지 오래이니 청년이 없어지고 있다. 지금의 출산율로는 120년 후엔 인구는 천만 명이 되고, 그 후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나라가 될 것이라 한다. 아이 낳는 일은 이제 나라가 통 사정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알파고와 맞서 돌을 놓고만 바둑 장수의 얼굴은 창백했다. 찌푸린 장수의 미간에 세상의 길이 운명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인공 지능의 실체를 맛보기 하며 화들짝 댔지만, 인간의 일을 야금야금 뺏어 온 지 오래다. 로봇으로 일자리 2/3가 없어질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사람은 뭐 하고 살지 으스스하다. 백 년이나 산다는데. 붉은 머리띠를 아무리 흔들어 보았자 키가 크지 않는 난쟁이가 된 경제에 내 몫만 챙겨질 수 있는 것인가? 그 또래들도 수많은 나가 되어 머리를 세우려 한다.

난쟁이가 말한다. 나라고 하는 수많은 그대들, 그대들이 곤혹스러워하는 만큼 나도 그렇다네. 경제학자들이 여러 말로 나를 정의해 왔지만, 그들 말대로 내가 굴러가지 않았지. 내가 그대들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어. 몫을 가르는 방법은 그대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야. 600만년 인류 역사를 100년으로 본다면 99년을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왔고, 겨우 1년간 몫 가르는 법을 시험해 온 거였어. 그러니 나도 잘 몰라. 문제는 그대들 안에 숨은 또 다른 그들의 욕심이야. 온 가을밤을 울어 예는 귀뚜라미 소리 한번 들어보시게. 자기 것이 없는 우주의 소리거든. 비워내는 소리. 그리 사는 것이네. 연필 한 자루 받고도 좋아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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