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주의 시와함께] 이슬의 탄생

이덕규(1961~ )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어

먹이사슬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나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어 간신히 동물이다

태어나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짧은 수명에

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중략

이슬이라는 단어 참 좋지요. 공책에 써놓고 나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말이라서 이슬이라는 단어 속에 차가운 옹기 하나 밀어 넣고 싶지요. 이슬 받아먹으며 무너진 땅속에 갇혀 백일을 버틴 사람의 이야기도 있지요. 혀가 마르면 사람이 죽는 거라, 이슬을 마시지도 못하고 혀에 적시기만 했다는 그 사람 어딘가에 살면서 자신을 구한 이슬 속에 뜨거운 물방울 하나 밀어 넣고 살겠지요. 이슬처럼 사라지진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슬 속에 천둥을 밀어 넣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일, 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이슬은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소멸이 아닌 환도의 일, 당신의 마음에서 생겨난 수많은 물방울의 일이기도 했지요. 아무도 모르는 이슬 속으로 들어가 살림을 차린 후, 한 사람에게만 남기고 싶은 시도 있지요. 몸 안의 이슬 다 떠나면 나도 저 자연사 가능할까요? 빛이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빛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이슬의 일, 당신의 몸 위로 흘러가 본 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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