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한 통의 외교문서로 요 임금 감동시킨 박인량

중국 동정호에 비친 달
중국 동정호에 비친 달

동정호 물결 속에 달이 빠지네

박인량

고국인 삼한 땅은 멀기만 하고 故國三韓遠(고국삼한원)

가을바람 나그네 생각도 많다 秋風客意多(추풍객의다)

외로운 배 하룻밤 꿈을 꾸는데 孤舟一夜夢(고주일야몽)

동정호 물결 속에 달이 빠지네 月落洞庭波(월락동정파)

*원제: [舟中夜吟(주중야음): 배 속에서 밤에 읊조림)]

1071년(문종 25년) 3월이었다. 고려의 사신단을 태운 배 한 척이 격심한 풍랑에 시달린 끝에 가까스로 중국[宋]에 가닿았다. 사신단의 문필을 담당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이 배를 타고 서해 바다를 건너갔던 박인량(朴寅亮:?~1096)! 그는 중국에서 지은 참으로 걸출한 시문들로 황제를 포함한 중국의 지식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박인량의 활약은 고려와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 고려를 중국에 못지않은 문화국으로 인정하고, '소중화'(小中華'작은 중국)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

더욱더 주목되는 것은 그 무렵부터 송나라 황제가 고려에 보내는 외교 문서 작성에 아주 각별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외교 문서를 보낼 때마다 문장력이 빼어난 신하들을 가려서 글을 짓게 했고, 지은 글들 가운데서 가장 잘된 것을 골라서 보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낼 때도 서장관의 문장력을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보냈다. 심지어 고려에 답하는 외교문서가 빼어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담당관이 파면당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까딱 잘못하면 고려로부터 개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조치들인데, 이 모두가 '박인량 효과'와 무관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1075년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다. 박인량은 단 한 통의 외교문서로 요나라 임금을 감동시켜 아주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이 사건은 문장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한 상징적 사례로 후대에 두고두고 칭송되었다. 1079년에 부사(副使)가 되어 두 번째로 중국 땅을 밟았을 때, 박인량은 이미 처음 갈 때의 촌뜨기 박인량이 아니었다. 그의 시가 노래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중국에 퍼져 있었고, 중국인들도 그에게 아주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그가 지은 시문들을 중심으로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는 문집을 간행해 주었던 것은 바로 그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할 때 박인량은 최치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최치원 이상으로 문학적 명성을 국제적으로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 낯선 이름일까? 행적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그의 저서들이 죄다 사라졌고, 남아 있는 작품들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온전한 것으로는 달랑 3수가 남아 전하는 박인량의 한시 가운데 하나다. 보다시피 화자는 광활한 동정호에 달이 첨벙 빠질 때, 일엽편주 속에서 개미 새끼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머나먼 바다 건너 고국 땅을 꿈꾸고 있다. 나그네의 우수를 이토록 짧은 작품에다 대우주적 차원의 거대 구도로 서늘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솥에 있는 국을 다 먹어봐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박인량의 시가 도달한 수준을 이 한 편으로도 알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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