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반격 모드로 돌아섰다. 촛불 민심의 퇴진 요구에 아랑곳없이 제갈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무에 복귀하더니 검찰 조사 거부라는 초강수를 내놨다. 국회에 가서 여야 협의로 총리를 추천해 달라고 했었는데 이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주엔 해운대 엘시티 비리 사건의 철저한 수사와 엄단을 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릴 한'중'일 정상회의 일정이 확정되면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대통령의 업무 복귀는 속전속결로 이뤄지고 있다. 최순실이란 그림자가 걷히자 대통령의 의사 결정이 신속해졌다. 지난 2일 노무현정부의 실세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총리 내정자로 발탁했을 때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다. 국민이 그토록 분노해도 꿈쩍 않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문고리 3인방을 한 방에 내친 데서 다시 결기를 확인했다. 김병준 총리 카드에서 시작해 국무위원 제청권, 해임 건의권, 국정 통할권 보장에 이어 국회의 총리 추천 수용에 이르기까지 야당을 향한 행보는 일사천리였다. 내 편 몇 명으로 철옹성을 쳤던 그 대통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속도전을 펼쳤다. 국민 분노 앞에 머리를 수그린 듯한 대통령의 거침없는 결정에 주춤주춤 물러서던 야당이 도리어 밀렸다. 실기한 야당은 지금 국회 추천 총리 카드까지 접어 넣으려는 대통령을 겨냥해 계속 거리로 나서거나 탄핵 카드밖에 손에 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자각은 너무 늦었다. 대통령은 검찰에 의해 이미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 과정에서 '성실히 검찰 조사를 받겠다'던 대국민 약속은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검찰 조사를 두고 '사상누각'이라며 더 이상의 조사를 거부하는 무모함까지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피의자 신분이 된 시한부 대통령이 국정 동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강공 모드로 돌아선 대통령을 두고 '샤이(Shy) 박근혜' 세력을 의식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지율 5%라는 궁지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솔깃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샤이 박근혜'는 '샤이 트럼프'에서 따온 말이다. 트럼프는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를 두고 소위 트럼프를 숨어서 지지하던 '샤이 트럼프' 세력이 응집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와 클린턴의 지지율은 선거 기간 중 각각 40%대에서 차이가 벌어졌다 좁혀졌다 했다. 지지율 차이는 웬만해선 두 자릿수로 벌어지지 않았다. 선거인단 선거라는 미국 대선의 특성상 트럼프가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해 당선되기는 했지만, 전체 득표 수에서는 클린턴이 앞섰다. '샤이 트럼프' 세력이 숨어 있었다는 가설 자체가 틀린 것이다.
하물며 이를 우리나라의 상황에 인용할 수 없다. 지난주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3주째 5%고 '잘못하고 있다'는 90%에 달했다. '샤이 박근혜' 세력은 없거나, 있어도 5% 미만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기대해야 할 것은 '샤이 박근혜'가 아니다. 90%에 이르는 '앵그리 박근혜'(박근혜에 성난 층)를 어떻게 다독이느냐다. 방법은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몰락에도 야당의 지지율 또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야당은 대통령과의 속도전에서 밀렸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서 국정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는데 계속 '더 더'만 요구하다 쥐고 있던 카드조차 놓쳤다.
덕분에 대통령이 다시 '질서 있는 퇴진'을 준비할 기회를 잡았다. 그렇다고 '샤이 박근혜'층을 결집해 국정동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하면 차라리 얻을 것이요, 얻으려 하면 오히려 잃게 된다. 지금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국정 중단 없는 퇴진'이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그 초석을 까는 것이 대통령이 마지막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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