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1>-엄창석

내가 대구의 근대 이야기를 써보려고 처음 생각한 것은 6,7년쯤 전이다. 프랑스인 샤를 바라가 쓴 '조선기행'에서 대구읍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해놓은 부분을 읽으면서였다. 물론 어릴 때부터 대구에 살아서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같은 독특한 이름의 거리가 시내에 있고 그곳이 성을 부순 자리임을 듣긴 했지만 타국 여행자의 글에서 붕괴되기 전의 읍성 모습을 관찰한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감동을 안겨다주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부터 대구를 포함한 한국 근대와 관련된 책을 읽고 수많은 자료사진과 논문들을 뒤적이면서 문학적으로 그 시절을 탐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 시절이란 1906년과 1907년으로 대한제국이 급격히 저물어가는 때고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발흥하던 때다.

나는 이번 소설을 구상하면서, 1907년의 대구를 '재현'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에서 나아가 1907년의 대구를 '재구성'하겠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대구성의 붕괴나 국채보상운동이라는 과거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의 뒷면과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마치 오늘날의 일처럼 바로 목전(目前)으로 호출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907년의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한 개별적 사건의 중심지가 아니라 더 확장된 근대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며, 더불어 그때가 어떤 측면에서 오늘날의 '거울'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서 당시의 실존인물들, 예컨대 서상돈, 김광제, 박중양, 염농산, 양기탁, 서병오 등도 변형된 인물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물론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다. 소설의 중심무대는 당연히 대구이다. 이야기는 대구성이 무너지는 1906년 늦가을부터 출발하여 국채보상운동을 거처 고종황제가 강제 하야하던 1907년 여름에서 막을 내린다.

소설의 제목은 미흡한 대로 이라고 정했다. '새'는 이상이나 꿈을 가진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저녁'은 하루 내내 날아다녔던 새가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좌절과 고통과 어떤 위안을 상징한다.

소설은 본 매일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매주 40매 분량으로 연재하며 6개월가량 진행할 계획이다.

이제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그 옷자락을 거둘 때 가슴 아프면서도 역동적인 힘이 솟구치던 '1907년 대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야심과 좌절, 성읍이 무너지는 굉음과 북후정의 함성이 내 책상 위에서 울리는 듯하다. 감히 소망하건대, 독자 여러분들께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새들의 저녁 - 엄창석

가져갈 것이 목장갑과 통조림 깡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2층 다다미방 창으로 매립공사를 하고 있는 부두가 멀리 보였다. 그는 경첩이 떨어져 위태롭게 기울어진 창문을 젖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영선산에서 해안까지 임시로 가설한 레일이 구겨진 종이에 펜으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어지러우면서 정교하게 얽혀 있고, 토석 운반용 트롤리 수십 대가 아침해를 어슷이 받고 있었다. 그 너머 빈 돛대가 촘촘히 꽂힌 작은 어선들 주위로 괭이갈매기 떼가 날아올랐다. 역광을 받은 까만 점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양이 회오리바람에 검은 눈발이 나부끼는 양했다. 그가 밖을 내다보고 있는 다다미방에는 십여 명의 장정들이 지난밤에 들이마신 술 냄새를 역겹게 풍기며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좁아터진 2층 다다미방에서 장정들과 뒤엉켜 생활한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문득 임계승은 자신의 나이가 많아진 것처럼 여겨졌다. 목에 가래가 끓었고 발가락마다 무좀이 흘렀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이맛살에 굵은 주름이 파인지도 몰랐다. 어딘가로 떠나기 때문에 나이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게다가 가는 곳이 고향이라면 흘러간 시간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집을 떠날 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에 새카만 얼굴을 한 그를 보고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이게 누구야? 방물장수 아들이네. 니가 살아 있었어? 남문 벽을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옹기들, 십자형으로 기와를 얹은 프랑스 성모당, 달서교 아래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재잘대던 계집아이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는 가방을 열고 꽁치와 새꼬막과 사슴고기 통조림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초량왜관 입구에 있는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담배 비누 양초 빗 성냥 같은 용품들을 진열해놓은 상점이었다. 거울을 사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정거장에 가는 길에 들러 반으로 잘라놓은 조롱박 같은 손거울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날 아침의 일이었다.

기차는 삼량진 정거장에 진입해 있었다. 동래부 초량정거장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바깥이 부산스러웠다. 그가 탄 화물칸에는 창문이 없어 밖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삼량진은 첫 번째 급수탑이 있는 곳이었다. 기차가 대략 50킬로미터마다 증기기관을 돌릴 용수를 공급받으니까 삼량진에서는 좀 더 오래 머물 것이다. 초량에서 함께 기차에 오른 이가 예순 명이었다. 일본인이 쉰 명이고 나머지가 한국인이다. 모두 3등석 객차에 탑승했다. 계승과 마종수는 구포를 지나면서 화물칸으로 건너왔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화물칸에서 편지 꾸러미와 수화물을 등지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10월 말인데도 꽤 쌀쌀했다. 그래도 매립공사 노무자 숙소보다 춥지 않았다. 기차는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플랫폼에는 많은 이들이 나와서 북적거렸다. 서울로 가는 이들이 대다수겠지만 안동과 만주의 봉천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자도 눈에 띄었다. 차림새가 행선지를 짐작하게 했다. 승객들이 객차 밖의 플랫폼을 벗어나지 않아서 6량의 기차가 내부를 고스란히 뱉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맨 앞쪽에는 프록코트 차림의 남자들과 화사한 빛깔의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어울려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다음에는 두터운 외투를 걸친 사내들이 주변의 단풍나무를 기웃거렸고, 끝에는 희고 푸른 작업복들이 거친 음성을 주고받고 있었다. 거대한 기관 차량이 허연 김을 허공으로 내뿜었다. 둥근 몸통에서만 아니라 차량 바닥에 정밀하게 교차되어 있는 부품과 바퀴 축 안쪽에서도 김이 자옥하게 흘러나와 승객들을 사이로 번지다 사라졌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급수탑에서 물을 보내는 급수관이 기관차 꼭대기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역원들이 직접 물동이를 날랐다. 몇몇은 높은 기관차 꼭대기로 물을 올리느라 펌프질을 해댔다. 급수탑이 습격을 당했을까. 탑 내부에 있는 펌프가 고장이 난 건지도 모른다. 경부선의 마지막 공사로 부산역과 초량역 구간이 완공되고 한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달리는 중에 기차가 공격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불과 일 년 반 만에 부산에서 의주까지 철길을 놓았으니 강제로 동원된 연선(沿線) 주민들의 불만이 여간 아니었다. 천리 철길을 따라 닭과 돼지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보급식량이 모자라 철길 근처의 가옥에 침입해 닭과 돼지를 다 잡아 먹었단 소리였다. 연선 주민들의 항거는 공사가 끝난 뒤로도 이어졌지만 그것은 고작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거나 레일에 돌 더미를 쌓아 운행을 방해하는 따위였다. 그딴 식으로 속상해 할 바에야 차라리 주거지를 옮겼고 자연스럽게 일인들이 연선 주변의 땅을 차지했다.

그와 동행하는 노무자들은 3등석 차량 옆에 모여 왁자하게 떠들었다. 대개가 일인이고 한인도 몇 사람 끼어 있었다. 한인들은 부산 매립공사장에서 함께 일했다는 가여운 자긍심을 띤 얼굴이었지만 잠자코 일인들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일인과 한인은 어딘지 모르게 차이가 났다. 얼굴이 더 창백하고 머리카락이 짧은 게 일인들 이지만 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구별하게 쉬운 게 옷이었는데 퍼렇게 염색한 무명옷을 늘어지게 입는 한인과 다르게 어깨선이 착 달라붙은 잠바를 입었다. 일인들은 비참한 매립공사장 생활을 마치 사치스러운 것인 양 떠벌리면서 앞쪽에 있는 장거리 여행자들에게 같은 나라 사람임을 알리려고 눈짓을 던졌으나 어림도 없었다. 화사하게 기모노를 입고 참새처럼 이마를 까닥이던 여인들이 양산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하카마하오리(일본 전통의복)를 입은 남자들은 아예 이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시늉이었다. 그럴수록 일꾼들은 비명을 지르듯이 왜어(倭語)를 소리질러서, 맨 뒤에 따로 떨어져 있던 계승에게도 들릴 판이었다.

"타이코데 나제 와레와레오 요부노?"

계승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왜 대구로 가냐는 말이 솔깃 귀를 당겼다.

"칸샤츠시 야마모토각카가 와타시다찌니 죠우카쿠오 도리하랏데 쿠렛또잇따."

옆에서 한 사람이 대꾸했다. 관찰사 야마모토 각하가 성을 걷어내어 달라고 우리를 초청했다는 얘기였다.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과장된 말투에 은근히 조롱기를 깔았다. 동료를 보고 하는 소린지 앞에 있는 거만한 자국인이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몹시 키가 작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어딘지 걸음거리가 약간 저는 듯했다. 기이하게 흰창이 많아서 눈이 번들거렸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가 쓰시마 출신인 우치타였다.

"그건 알지. 왜 대구 사람을 쓰지 않고 부산에 있는 우리를 부르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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