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2월, 졸업(연세대학교 기계공학과)을 앞둔 청년 이충곤은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들과 이별을 나누었다. 내년 2월 열리는 졸업식을 제외하면 모든 학사 일정은 이미 마무리됐고, 청년 이충곤이 가야 할 길도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2남 4녀의 장남, 이충곤에게 부친 이해준 회장이 창업한 '삼립산업주식회사'는 어릴 적부터 하나의 운명이었다. 기계공학과로 진학한 것도 "기술을 알아야 가업을 제대로 계승'발전시킬 수 있다"는 아버지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교 때 적성검사 결과는 이과보다는 문과에 더 적합한 것으로 나왔지만 부친의 뜻을 따랐다.
"그때 세 가지를 맹세했습니다. 이왕에 가업을 이을 거라면 '(재벌 기업을 제외하고) 대구경북에서 제일 큰 기업으로 키워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1등 제품을 만들어야겠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삶의 보람 있는 터전으로 만들어야겠다'입니다."
고희를 훌쩍 넘긴 이충곤(74) 회장은 청년 시절 다짐했던 '자신과의 세 가지 약속' 중 두 가지는 지킨 것 같다고 말했다. 에스엘은 대구경북 최대의 제조업체로 성장했고, 에스엘 제품에 대한 고객 만족도로 볼 때 '1등 제품을 만들겠다'던 두 번째 약속도 달성한 셈이다. 고민은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이다. 에스엘이 직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기업'으로 영원히 남는 것. 이충곤 회장은 요즘 이 '마지막 약속'을 지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세 명이 지었다'고 해서 삼립!
에스엘은 1954년 자동차부품상회인 '성광사'를 경영하던 이충곤 회장의 선친 이해준 회장이 신규희, 남두성 선생과 함께 대구 칠성동에 '삼립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세 명이 지었다'는 의미에서 삼립(SamLip)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당시 이충곤 회장은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SL로 회사명이 바뀐 것은 사업 영역이 전 세계로 확대된 2004년부터였다.)
그러나 초기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군납을 타깃으로 10여 종의 부품을 생산했지만 품질이 훨씬 뛰어난 밀수품의 성행으로 자동차부품회사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삼림자동차공업주식회사도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두 명의 동업자는 투자 철수를 결정했고, 1961년 회사 전체를 이해준 회장이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투자금을 되돌려줘야 해서 남일동 집을 비롯해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내다 팔았습니다. 여동생이 아끼던 피아노를 팔 때가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동생의 대학 진학을 위해 아버지께서 어렵게 장만해주신 건데…."
이렇게 이충곤 회장 가족은 칠성동 공장 내 소박한 사택으로 들어가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체험한 이때의 경험으로 에스엘은 창사 이래 단 한 번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는 비법(?)을 익히게 되었다.
◆'자동차부품'을 살린 '자전거'?
선친 이해준 회장은 고바야시광업회사, 경전여객자동차에서 자동차를 직접 다루고 자동차부품상회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자동차부품 생산업체를 세웠지만, 1950년대 중반은 국내 자동차부품산업이 발전하기에는 너무나 여건이 열악했다.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생산시설을 활용한 자전거부품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덕분에 국내 최초로 자전거 램프 생산에 성공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이충곤 회장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사무소에 입사할 당시, 에스엘 매출의 70%는 자전거에서, 나머지 30% 정도가 자동차부품 몫이었다. 회사의 주력인 자전거 부문은 선친 이해준 회장이, 자동차부품 부문은 이충곤 회장이 각각 책임을 졌다.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으로서 에스엘의 미래는 오롯이 이충곤 회장의 몫이었다.
"자전거는 오늘날의 에스엘을 있게 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자전거 부문에서 올린 매출과 수익으로 자동차부품에 대한 기술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많은 자동차부품기업들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엘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자전거 부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내 자동차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자전거 부문을 축소해간 에스엘은 1983년 완전한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선택과 집중, 하늘이 돕다
창업 초기 에스엘의 생산품은 자동차 헤드램프, 클러치 디스크, 머플러, 초크레버 등 10여 종에 달했다. 영세한 사업장에서 여러 종류의 품목을 생산한다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헤드램프를 중심으로 한 램프 분야에 집중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19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되면서 '하늘이 준 기회'가 왔다. 현대자동차 헤드램프 납품권을 두고 3, 4개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충곤 회장이 자동차부품 분야 책임자였다. 포드사와 협력한 현대차는 헤드램프 모양을 기존의 둥근 형에서 4각형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만일 에스엘이 램프 분야로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술적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기술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경쟁사가 막강한 로비력을 바탕으로 현대차 고위 임원들을 공략하고 나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에스엘은 어쩔 수 없이 기술력과 품질 경쟁력을 믿고 실무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에스엘은 납품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제2의 도약이 시작된 셈이다.
"그때 우리가 현대차 납품권을 따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에스엘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장을 중시하고 실무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현대차의 기업문화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현대차가 글로벌 완성차업체로 급성장해 나갈 때, 우리 에스엘도 그 눈높이에 맞게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선택과 집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경쟁력이다
이충곤 회장은 2015년 노사문화유공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에스엘은 1954년 창업 이래 단 한 번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았다. 노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에스엘의 노조는 1968년 설립되었다.
에스엘의 노사문화 비결은 대구 노원공장(지금은 창고로 사용) 입구 비석의 글 '인간제일주의'에서 엿볼 수 있다. 1970년 세워진 1만6천528㎡(5천 평) 규모의 노원공장은 에스엘이 영세업체에서 벗어나 하나의 기업으로서 형태를 갖춘 첫 출발이었다. 그만큼 이해준'이충곤 회장 모두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이충곤 회장은 칠성동 공장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생활하며 보고 듣고 체험한 모든 경험을 녹여 '인간제일주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비석의 글은 회사 직원이 직접 썼다.
"노사관계는 일 년 농사와 같습니다. 사시사철 돌보지 않으면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생겼을 때가 아니라, 평소에 소통하고 교류하며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모든 걸 오픈하고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가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이충곤 회장은 요즘 2006년 이후 사재 20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에스엘서봉재단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크다.
"삶은 유한하지만 재단은 영속할 수 있습니다. 초석을 잘 마련해 두면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재단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1천억원 정도의 기금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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