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뼈가 시리는 추운 날씨였다.
드넓게 펼쳐진 수면은 얼음으로 덮여 우윳빛이었다. 저수지 가장자리는 보트들이 둑에 코를 박고 있고, 포플러나무에서 빠져나온 붉은 석양이 보트와 얼음에 꽂힌 죽은 새들을 비추고 있었다. 저수지 얼음 밑으로 물이 숨을 쉬는 듯, 보트가 얼음을 약간씩 떠밀면서 흔들흔들했다. 권종성은 저수지 남쪽 제방에 우뚝 솟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바라크로 지붕을 덮고 나무로 벽을 친 일본식 단층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은 팔조령 가는 길에 있는 파잠(巴岑, 파동) 사람으로 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던 시기에 영선못으로 와서 여관을 열었다. 대구는 평지에다 드문드문 구릉만 있는 삭막한 도시였다. 강이라 해봤자 바닥이 훤히 보이는 몇 가닥 개천이 전부였고, 명소인 팔공산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나마 남문에서 대덕산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3만평 넓이의 영선못이 도심과 가깝고 경관이 빼어나 나들이객이 많이 몰렸다. 봄부터 가을가지 보트를 띄우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겨울이라 저수지가 얼어붙고 주변도 을씨년스러웠다.
권중성은 여관 마당 한가운데 세워진 인력거를 보았다. 바퀴가 크고 뒤가 높다랗게 들린 멋진 인력거였다. 서요가 먼저 왔나 보네. 인력거가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구는 길이 좁아 인격거가 다니기에 불편했다. 아니면 일경 경부보(警部補)인 후루쇼가 왔나? 그렇게 짐작하는데 튱튱, 총소리가 들렸다. 엽총이 아니라 권총 소리였다. 권종성은 현관 앞을 돌아 뒤뜰로 나갔다. 그물이 크게 쳐져 있고 서요가 날아다니는 꿩을 권총으로 쏘고 있는 게 보였다. 서요 옆에 후루쇼가 팔짱을 끼고 있다가 간간히 꿩을 가리키며 웃어댔다.
권종성은 몇 걸음 물러서서 서요와 후루쇼가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몸을 숨겼다. 아직 약속 시간 전이었다. 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서요는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를 설립한 서석림의 둘째 아들이었다. 서요가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말을 틀 수 없었다. 거부의 아들인 데다 그를 광문사에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광문사에 오기 전에 수창사에서 근무했으니까 서요가 권종성을 수창사에 취직시켰다는 게 옳을 것이다.) 서요는 히자쓰키라는 일본인이 세운 일어학교를 다녔고, 많은 일인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 박중양 관찰사와 마찬가지로 일어에 능통했다. 그의 아버지 서석림이 대구 신흥세력의 중심인물이라면 그도 어떤 면에서 새로운 중심인물이었다. 아버지는 민족운동을 하고 아들은 일인들의 친구인 것이다. 그가 일어학교를 다니게 된 게 아버지가 권유해서라고 하니까 쉽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권종성은 그때 일을 생각했다. 여동생이 아기를 가진 것을 왜 몰랐을까. 진즉 낌새를 알아챘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동생은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큰시장 북쪽인 북후정을 돌아 흐르는 개천에 갓난아기가 버려진 사건으로 시장이 시끄러웠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고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의 집으로 순검들이 들이닥쳤다. 여동생이 맨발로 마당을 내려서다 쓰러졌고 순검 하나가 짐짝처럼 동생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가 동문 앞의 비어홀에서 서요를 만난 게 동생이 감옥에 갇힌 다음 날이었다.
"요즘 뇌물이 먹히지 않아."
서요는, 한두 해 전만 해도 간수에게 돈을 주면 웬만한 죄수는 빼낼 수 있지만 이젠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을 거다. 잡혀오는 화적들이 늘어나면서 형의 집행은 가차 없었다. 지난해 한일 간에 새 조약(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무수한 곳에서 폭발하듯 의병이 일어났고, 의병을 빙자해서 도적떼도 들끓었다. 일본경찰은 의병과 도적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교묘한 전략이었다. 의병을 도적이라 해서 명분을 제거해 힘을 빼앗았고, 잡범들에겐 그만큼 가혹해서 일본이 얼마나 백성의 편인지를 뽐냈다. 서요를 만나고 나흘 후, 여동생이 풀려났다. 그는 집에 돌아와 누워 있는 동생에게 미음을 떠먹이며 말했다. 걱정마라. 학교에 가서 일어를 배워. 그러면 일인 상점에 취직할 수 있고 나중에 유학도 갈 수 있어. 아마 서석림을 흉내 내서 내뱉은 말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전 같으면 애를 낳은 동생이 기방으로 가서 삼패(三牌)기생이나 되었겠지만 이런 격한 일은 오히려 조선의 묵은 관습에서 벗어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비어홀에서 한껏 맥주를 마셨다. 서요와, 서요가 불러낸 일본 경찰 후루쇼도 함께 잔을 비웠다. 동생이 풀려나는 대가로 광문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경에게 보고하기로 한 것이다. 그딴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러나 무서웠다. 동료나 회사를 배신하는 짓이 아닌가. 그들이 끌려가서 도적 취급을 받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 모른다. 여동생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후루쇼가 껄껄 웃었다.
"염려 놓게. 광문사에 어떤 위해도 없을 거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하하, 한 시간만 지나면 믿게 될 거야."
그날 비어홀을 나서면서 후루쇼가 따라오라고 했다. 권종성이 간 곳은 성안에 있는 감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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