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이덕임 옮김/이야기가 있는 집 펴냄
역사에 실재했던 분노의 형태와 그 표출 방식을 통해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현실 속 분노를 문학'철학'심리학'자본주의'마르크시즘'종교'혁명 등과 연결해 설명하며, 분노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역사의 중심에는 분노가 있었다
분노는 인간의 여러 감정 중 하나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 분노가 깨어나기도 하고, 믿음이 분노를 조장하기도 한다. 가령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롤레타리아의 믿음은 집단적 맹신을 낳았고, 분노한 시민은 바스티유를 습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권력자의 자리 이동뿐이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고, 분노는 어떤 형식으로든 표출된다. 민족주의에 휩싸인 분노는 테러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혁명가들은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체제 전복을 꿈꾸고, 정치가들은 분노를 기획하고 투자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반대파를 무너뜨린다. 그런가 하면 신의 이름으로 복수를 꾀하는 자들은 분노를 기획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한다.(예를 제시하고 보니 분노가 언제나 나쁜 방향으로 이행됐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노가 역사발전을 이끈 경우도 많다. 이 책은 분노가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용이 아니라, 분노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대 서구사회 사람들은 모든 시작의 바탕에는 분노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쓴 서사시 '일리아드'의 첫머리 역시 분노로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루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중략) 숱한 영웅들의 굳센 영혼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의 몸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작가는 분노를 앞세움으로써 이 작품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패한 자의 운명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분노가 드러나는 방식(폭발'복수'혁명)
분노가 점점 더 복잡한 방식으로 발전할 때, 분노의 씨앗은 널리 퍼져 나간다. 복수의 의도가 무르익는 곳마다 어두운 에너지가 자리를 잡는다. 복수하려는 마음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복수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되면 '분노'는 이제 존재 자체가 된다. 분노가 존재 자체가 되면, 분노할 원인이 미약하거나 원인이 없더라도 분노는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증폭된다.
조직화된 분노는 즉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순한 폭발'의 차원을 지나, 대중적이고 정치적인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 분노가 맹목적 표출 방식에서 벗어나 장기적 안목을 가진 혁명적 프로젝트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복수는 분노의 기획된 표출 방식이다. 복수를 실행하려는 강력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끈질긴 의지를 가지며, 의지가 있는 한 지루함 따위는 없다. 복수하려는 자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자유롭게 혹은 임의대로 살 수 없다. 그의 삶에 우연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분노로 가득한 자가 달려가는 길은 그 자신에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 아니라 폭발이라는 기대의 길'이다. 어떤 면에서는 희열을 향해 질주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분노한 자신의 파멸로 귀결되거나 인생의 공허함으로 연결되지만, 복수를 실행하려는 의지로 뭉친 사람에게 분노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과정'이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자신의 동료 카메네프와 제르진스키에게 "희생양을 선택하고, 일분일초 단위로 계획하며 달래기 힘든 복수의 허기를 해소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일, 세상에 그보다 달콤한 일은 없다네"라며, 분노와 복수가 자기 인생을 충만하게 해주는 자양이라고 토로했다.
◆분노를 채우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는 '은행'
'무정부주의'와 '폭력의 낭만주의'는 기획된 분노의 '자식'이다. 무정부주의나 폭력의 낭만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기획자들은 '은행'에 분노를 채우기도 하고, 분노를 차용하기도 한다. 이때 은행, 즉 분노의 창고가 하는 일은 일반 은행과 마찬가지로 자원을 모으고,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기획자들은 분노를 제대로 폭발시키기 위해 또 고귀한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 개별적 분노의 계획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런 요구에는 '역사'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이 늘 붙는다.
분노의 표출에서 '역사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복수심에 찬 일반적 행위는 범죄행위로 간주되고, 처벌을 받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기획자들은 분노에서 기인한 행위를 '역사적 관점'으로 통합하려고 애를 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작은 규모의 분노는 불장난으로 저절로 소멸했다. 분노라는 지엽적 자산을 장기적으로 저축하지 않거나, 안목을 가진 지도자의 안내가 없다면 분노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참을 수 없어 분노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만다. (개별적으로 혹은 소규모로) 고립된 분노 에너지는 긴 안목과 침착함을 지닌 사악한 지도자의 체계적인 관리를 받아 증폭하고, 거대한 에너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분노를 키우고 전승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손들을 복수의 칼을 가는 역사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진정으로 분노하고, 인류 발전을 꾀하려면
분노는 개인관계에서, 또 정치적'문화적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의 기본 동력이다.
지은이는 "분노는 발전과 변화의 중심동력이다. 하지만 이 사나운 충동은 고대부터 통제된 방식으로 조절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조절되었기에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20세기 전체주의가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변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은 "진정으로 분노하는 법은 무차별적인 폭력이 아니며, 또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진정한 분노는 바른 역사 방향을 세우는 쪽으로 분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동서양 역사 속의 다양한 (그리고 조직화된) 분노와 그것들이 표출된 과정과 방식, 그 결과를 다룬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분노에서부터 대중을 선동하는 집단적 맹신의 분노, 유일신교의 지속적인 지배를 위한 신의 분노, 근대 전체주의의 조직화된 분노,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으로서의 분노, 복수를 위한 이슬람의 분노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와 분노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인지 읽기 불편한 문장들이 많다.
▷ 지은이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1947년 출생했으며, 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미학 및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424쪽, 1만4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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