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국 정당'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산의 최인호'박재호'전재수 국회의원은 부산경남(PK)에서 활동하다 청와대로 발탁됐던 인물들입니다. 이제 남은 곳은 대구경북(TK)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께 TK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재를 발탁하도록 적극 건의하겠습니다."
이강철(71) 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정무특별보좌관'이하 특보)은 "이제 TK에서도 야당(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으로 여당이 되었지만 이강철 특보는 TK에서 민주당은 여전히 야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이 복원되고 있는 시기"라면서 "TK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인사보다는 TK 현지에서 활동하는 인재가 많이 발탁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직접 참여정부에 이어 문재인정부에서 일을 하기보다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제 고희(古稀)도 넘었고, 손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자신의 당선을 '노무현 꿈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천착해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등 꿈은 계승하고, 넘어설 것은 넘어설 것으로 봅니다. 솔직히 TK 인사가 현 정부에서 더 우대받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소외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범한 학생에서 민주투사로!
이 특보는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신동에서 실공장과 가게를 함께 운영하면서 섬유공장에 납품을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어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대구서부초교, 대구중, 계성고를 다닐 때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1966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당시 정외과 정원은 10명이었는데, 데모 주도와 제적 등으로 인해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67년 6'8 부정선거 데모에 참여하면서 '나라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해 11월 군에 입대해 3년간 대구와 영천에서 복무했다.
복학을 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복학 이듬해인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었다. 위수령이 발동된 가운데 유신반대 활동을 모의한 혐의로 여정남 등 친한 선후배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말살한 공포통치로 야당과 언론은 어용화되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세력화되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반정부(민주화) 세력은 기껏해야 '학생들'뿐이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던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반대 데모가 처음 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언론통제와 검열 탓에 잘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 경북대에서 두 번째 유신반대 데모가 열렸고, 후문을 지나 경북도청 부근까지 진출하게 됐습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수 없었고, 전국적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강철을 포함한 3명의 주동자들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경북대 시위를 계기로 11월에는 유신반대 데모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그런데도 구속자는 서울대 문리대 및 경북대 데모 주동자뿐이었다. 고교생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유신반대 시위에 참가해 독재정권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12월 구속자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시위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빨갱이란 말 함부로 하지 마라!"
1974년 1월 4일 새해 벽두부터 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 2, 3호를 발동했다. 유신반대라는 '말'만 해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영장 없이 구속할 수 있는 초헌법적인 조치였다. 서울대 문리대와 경북대는 긴급조치 발동에 대응하기 위한 전국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왜 10월 유신이 철폐되어야 하는지 유인물을 만들어 전국 대학에 배포했다.
"당시에는 경찰이 대학 내에 주둔하고 있을 정도로 공포통치가 만연해 데모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유신반대 유인물도 특정대학 이름으로 발표하기 부담스러워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붙인 이름이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었습니다. 이게 순식간에 반국가단체로 조작되었습니다."
이강철 특보는 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관련자 중 가장 오랜 기간인 7년 4개월을 복역했다. 20년형을 선고받은 다른 관련자보다 이 특보가 더 오랜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보니 집히는 게 있습니다. 첫째는 박정희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유신반대 데모를 주도한 괘씸죄. 또 하나는 1심 최후 진술 때 중앙정보부의 고문 사실을 폭로해 외신에 보도되게 한 죄, 이 두 가지입니다." 실제로 이 특보는 1심 재판 후 중앙정보부로 다시 끌려가 협박을 당했다.
이 특보가 오랜 감옥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어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용돈 30만원을 준 친형은 도피자금 제공으로 영장도 없이 서울구치소에서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고, 그 때문에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 역시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 특보가 출소할 때, 유복했던 집안은 신암동 산골짜기 오두막집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제가 옥살이하는 동안 겨울에도 보일러를 때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빨갱이'라고 하면 가슴이 미어터집니다. 독재정권이 자신을 반대한다고 빨갱이로 몰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씻지 못할 고통을 주었는지 이제는 뚜렷이 기억해야 합니다."
◆노무현과 '왕수석' vs '왕특보'?
35세에 출소한 이 특보는 이듬해 1982년 모친의 권유로 맞선을 본 뒤 고 김경숙 여사(당시 초교 교사)와 결혼했다. 처가집의 반대가 심했고, 김 여사는 단식으로 맞섰다. "다시는 데모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겨우 허락을 받았다. 변변한 직장이 없어 부인의 수입으로 생활했고, 선후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본격적인 재야생활은 1984년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의장 박병기 신부) 사무국장을 맡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1980년대부터 재야운동을 하며 안면이 있었지만, 1992년 민주연합과 민주당이 통합하면서 인연이 본격화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직설적이고 화통하며 꾸밈없는 성격이 저와 비슷했습니다.(노무현은 총선에 부산에서 3번 출마해 3번 떨어졌고, 이강철은 대구에서 5번 출마해 5번 떨어졌다) 제가 꿈꾸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을 노무현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1996년 제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비웃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당시 '왕수석' 문재인과 '왕특보' 이강철의 관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재인 당시 정무수석은 비정치적이고 모범생 스타일로 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서로 잘 맞는 보완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17대 총선 패배 후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으로 오라는 요청이 왔을 때, 문재인 대통령을 민정수석으로 추천하고 저는 시민사회수석으로 갔습니다."
이 특보는 또 "대선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완전히 달라져 깜짝 놀랐다"면서 "참여정부 청와대 5년과 18대 대선 패배를 겪으면서 엄청나게 큰 인물로 성장한 것 같다.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TK 마음이 열리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TK의 지지가 마의 20%를 넘었습니다. 30%를 목표로 한 민주당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유의미한 득표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TK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72.8%, 민주당 지지도 37.5%로 한국당(22.2%)과 바른정당(8.4%)을 앞선 것에서 더 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특보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대구경북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지역민들도 마음의 문을 더 열 것"이라면서 "대구경북에서 수구가 아니라 건강한 보수가 기반을 잡고, 진보도 싹을 틔울 수 있는 정치지형을 갖춰야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 일당 독식은 시'도민에게 피해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6'8 부정선거=1967년 6월 8일은 1963년 민정이양 이후 두 번째 총선거였다. 3선 개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과 여당은 최소 110석 확보를 목표로 했다. 반면 야당은 과반수 확보를 목표로 선거전에 임했다. 6'8선거에서 정부와 여당은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여수와 벌교는 공개투표, 부산은 대리투표, 의성'공주'보성은 표 바꿔치기, 대전은 무더기 투표 등 전국에서 부정 투'개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여당인 공화당은 3분의 2 이상인 129석을 차지했다.
*인민혁명당 사건(속칭 인혁당 사건)=유신반대 성향이 있는 여정남, 도예종 등이 기소되어 대법원의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유신독재의 대표적 용공조작 및 인권유린 사건. 한국방송 '미디어비평'은 '오늘의 역사'에서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밝혀졌음을 보도한 바 있다.
*민청학련 사건=학생'종교인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그 배후로 지목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련 180명을 구속'기소한 사건. 박정희 정권은 북한이 인민혁명당을 지원하고,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정했다고 주장했다.(훗날 인혁당'민청학련 관련자 모두 대법원 무죄 판결)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