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과 사람] 계간지 '시와 반시' 만드는 사람들

"결석 없이 통권 100호, 지방에도 詩전문지 하나쯤 있어야죠"

강현국 주간
'시와반시'는 1992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경제적 어려움으로 수차례 휴간 혹은 폐간 위기를 맞이했지만, 시와반시를 만드는 사람들은 뚝심과 오기, 사명감으로 지난 25년간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발행을 지속했고, 올여름 100호 발행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발행된 '시와반시' 각호들. 작은 사진은 초대 발행인 김경옥 씨.
강현국 주간

1992년 가을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와반시'가 2017년 여름 호로 통권 100호를 발행했다. 25년간 단 한 번도 결호 없이, 강현국 주간의 표현대로 '크게 타락하지 않고' 긴 세월의 풍파를 이겨온 것이다.

시 전문 잡지 100호 발행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척박한 우리나라 문학 현실을 고려할 때, 그보다 더 척박하고 위태로운 문예지 상황을 고려할 때, 결호 없는 100호 발행은 대단한 성과다. 문화예술의 서울집중 현상이 심각한 한국의 문학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오기와 고독으로 시작했다.

"25년 전 우리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도 제대로 된 시 전문 잡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소망으로 시작했다. 그 소망을 현실로 옮기기까지 많은 갈증과 허기의 시간이 퇴적돼 있었다. 우리가 발 디딘 땅, 삶의 중심이 우리의 문학적 상상의 토대여야 함은 자명했다. 그러나 당시 문학 저널리즘은 오롯이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중앙 시단과는 다른, 신선한 영양을 공급할 제3의 심장이 절실히 필요했다."

강현국 주간은 1992년 가을 '시와반시' 창간호를 발행했던 때를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그들은 오기와 고독을 무기로 '시와반시'라는 작은 씨앗을 뿌렸다. 위기와 절망이 수시로 엄습했지만 오기와 고독은 여태 풍화되지 않았고, 100호를 발행했다.

1992년 대구에서 '시와반시'를 발간할 당시만 해도 전국 지방 도시에는 본격 문예지가 하나도 없었다. 근대 문예지 100년사에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시와반시' 창간을 시작으로 부산에서 '시와 사상', 광주에서 '시와 사람', 제주에서 '다층' 등 본격 문예지가 나타났다.

◆창간정신 끝까지 지켜냈다.

25년 동안 전국에서 수많은 문예지들이 창간과 폐간을 거듭했다. 살아남은 문예지들 중 상당수는 '옆길'로 샜다. 발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등단장사'를 하는 문예지들도 많았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인' 타이틀을 건네는 대가로 발행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강현국 주간은 "문예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신인 발굴이다. 우리는 엄정한 눈으로 좋은 신인을 찾으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49명의 시인과 평론가 2명을 신인 추천이라는 이름으로 문단에 풀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문학 이외의 조건을 생각한 적이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절실하되 낯선, 낯설되 뜨거운, 뜨겁되 신선한 언어를 가진 시인들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는 "우리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반시'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느냐고 끝없이 질문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좋은 시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상처와 고충도 있었다. 그러나 옥석은 가려야 했다. 그런 안간힘이 있었기에 오늘의 '시와반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로 '시와반시'를 지탱했고, 또 많은 분들이 좋은 글을 써 주었고, 500여 명의 고정독자들이 '시와반시'를 지켜주었다.

강 주간은 "이제 '시와반시'는 우리나라 문단에 없어서는 안 될 공기(公器)이자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과분한 말씀이지만 듣기 싫지 않다. 그 찬사가 과분한 평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끝없이 시인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고 말한다.

◆문예지의 횡포와 독자의 외면

1970, 80년대 서울 주요 문예지들은 군사정권의 횡포를 증오하면서 그들 자신은 군사정권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서울에서 잡지 만드는 사람들이 지방을 방문하면 지방의 시인들은 밤늦도록 술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래야 문예지 한쪽에 이름이라도 낼 수 있었고, 한 줄짜리 서평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1990년대에 들면서 기존 문예지의 횡포에 대항해 서울과 지방에서 문예지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그토록 증오하던 문단권력의 폐습을 답습했다. 작가들 줄세우기는 기본이고 등단장사, 책 강매, 술 시중 등 온갖 횡포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 폐습이 영원할 수는 없었고, 폐습에 젖은 문예지들은 하나둘 사멸했다.

게다가 독자들은 '일방통행식 그들만의 잔치'에 취한 문예지를 외면했고 수많은 문예지들이 사라져갔다.

윤일현 시인은 '시와반시' 100호에 실린 '시와반시의 발전적 지속을 위한 외연 확대 방안' 글에서 "독자가 잡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소비하던 시대는 끝났다. 폭력적 패권주의, 중앙집권적 지배원리는 수명을 다했다. 과거에는 부분이 전체의 부속품으로 간주됐지만 이제는 부분의 합이 전체를 넘어 전체가 부분 속에서 실현되는 시대다. 잡지와 작가, 잡지와 독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고 말한다.

◆주요 문예지의 대중화 바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우수문예지발간 지원사업'을 폐지한 2006년 이래 문예지들의 폐간과 휴간은 더욱 가속화됐다.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 중 하나인 '민음사'는 40년간 발행해온 '세계문학'을 폐간하고 '릿터'(Littor)를 창간했고, '창작과비평'은 종이와 온라인, 현장을 아우르는 '문학3'을 출간했다. 그런가 하면 '은행나무'는 '악스터'(Axt)를, '엘릭시르'는 '미스테리아'(MISTERIA)를 창간했다. 이들 문예지의 공통점은 무겁고 어려운 담론을 담은 비평보다는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 덕분에 독자들 반응이 좋아 각각 초판 3천 부~1만 부 판매라는 기염을 토했다.

윤 시인은 "문예지의 대중화는 시대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와반시'가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릿터' '악스터' '미스테리아'와 같은 길을 따라갈 수는 없고,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시와반시'는 창간정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대중성에 영합하는 잡지가 많아질수록 작가들은 발표지면을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시와반시'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모색하더라도 신인발굴과 기성작가에게 발표지면 제공이라는 고유의 기능과 역할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독자와 소통은 중요하지만 독자의 취향에 일방적으로 맞추게 되면 문예지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문예지의 사회적'문학적 기여도 역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적 팽창 대신 질적 향상 도모

윤 시인은 "우리나라 어느 잡지도 진영 논란을 피해가기 어렵듯, '시와반시' 역시 정실 위주의 편집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편집자가 기획하고 청탁하는 원고가 지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전국의 시인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투고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시와반시'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른 작품,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면 과감하게 실어야 한다"며 "특히 독자와 소통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작가와 독자가 '시와반시'를 매개로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 주간은 "변방의 척박한 토양에서 '시와반시'가 지난 25년간 이룩한 성과는 이 땅의 문화적 다양성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창간정신을 지켜가면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우리가 생존과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주요 문예지와 차별화되는 콘텐츠로 문화다양성을 키워나갈 것이다.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양적 팽창 대신 장인정신에 입각해 '다품종 소량생산' '질적 향상'을 도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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